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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uhapark Nov 02. 2021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가 상해까지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상해 입성

 

    

     2017년 3월 첫 미팅을 위해, 상해에 방문했다. 이 프로젝트는 제조사에서 외부 인사를 고용해서 새로운 방향성을 찾고자 TF팀으로 구성해서, 진행한 프로젝트이다. 첫 만남에 임원분들과 함께 자리했는데, 이사님 덕분에 좋은 기회로 이곳과 일하게 된 거라고 생각한다. 첫 미팅 당시 나는 프리랜서 때 사용하던 명함을 가져왔고, 명함을 드렸는데 모두 반응이 ‘어떻게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명함’ 일 수 있냐며 놀라셨다. 아마 기존에 가지고 계시던 명함과는 전혀 다른 타입이라 놀라신 듯하다. 한 편으로 작지만 명함 하나로, 약간의 새로움을 줄 수 있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첫인상에 나를 인식시키기에 명함이 중요하구나.라고 느꼈던 자리였다. 하지만, 그때 들은 말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게, "명함이 뭐가 중요하노, 사람이 괜찮아야지."라는 말 기억에 남는다.  뼈 있는 말 한마디가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이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새로운 시장을 위해 도전하는 자, 브랜딩을 통해 수익을 내고 싶은 자, 그리고 브랜딩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싶은 자. 이렇게 모였고, 각자의 목표가 하나로 합쳐져 같은 꿈을 꿀 수 있는 이 상황이 너무 좋았다. 나만 잘하면 되겠다. 라는 생각이 강했다. (이건 사실 혼자만의 생각이기도 하다. 풋내기가 뭘 알겠어. 하지만 내 생각은 그랬다.) 제조 전문 회사에서, 제조뿐 아니라, 디자인, 그리고 브랜드까지 개발해서 제공하겠다는 뜻으로, 브랜드 개발을 위한 팀이었다. 그리고, TF 팀이란 즉슨, 망하면 해체될 수 있다는 뜻

우리는 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고, 다들 얕은 관계 속에서 서로 어떻게 신뢰할 것인가.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 간 보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서로가 생각하는 이상을 향해 한껏 기대감을 가지고, 같이 잘해보자며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상해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돌아와서, 나는 서울에서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부산으로 내려 갔다. 


   처음부터 부산에 자취할 계획은 없었다. 창원에서 출퇴근해도 되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고, 하지만 막상 닥치니 왕복 4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일주일 만에 집을 구하게 됐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 시작할 당시, 급여도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가 내려오고 난 뒤 알게 된 월급. 교통비와 시간 생각하면 월세값 내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산으로 옮기게 되었다. 해운대에 자리한 집은 서울보다 가격이 저렴한데 집 퀄리티도 훨씬 좋고, 너무 만족스러웠다. 주변에 아는 사람이라고 없지만, 나는 오히려 즐기는 타입인 것 같다. 혼자 맨땅에 헤딩하고, 개척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듯한. 무튼, 그렇게 부산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걸어서 15분 거리에 해운대 바닷가가 있었고, 집 앞에는 이마트. 센텀에 위치한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해운대 바닷가, 고생하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안정되고 편한 부산 생활이 시작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생활이 나아지니 삶의 질이 올라갔다. 


그저, 일에만 집중하면 됐다. 모든 환경이 일하기에 최적화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산생활이 마냥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프리랜서였고, 언제든 잘릴 수 있었다. 내가 잘 못하거나, 이 프로젝트에 도움이 안 되면 언제든 잘릴 수 있다는 심리적 압박감을 가지고 시작되었다. 물론, 잘하면 그만큼 좋은 성과로 나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서 잘 해내야 한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더 물러 설 곳도 없었다. 서울에서 짐 다 싸들고 이거 제대로 해보려고 내려왔는데, 잘 안될 거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고민도 많았고, 스트레스도 많았다. 난 화장품 브랜딩은 처음이었고, 그래픽으로 돈을 벌며 지내긴 했지만, 사용하는 툴 수준이 시각디자인 전공자들 수준에 미치지 못하진 않을까 라는 부담도 있었고, 스스로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돈 받는 만큼의 실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부산에서 정말 책을 가까이하면서 살았다. 내가 의존할 곳은 책뿐이더라. 주변에 친구들도 적었고,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혼자 고민하고, 삭히고, 풀고, 그렇게 긍정적인 것만 바라보면서 현재 수준에서 갖춰야 하는데 부족하다고 느낀 부분들을 채우려고 했고, 브랜딩에 대해서 이해도 필요했다.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것들에 대한 보다 넓은 시각이 필요해서, 많이 보고 공부하며 훈련하는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이사님과 함께하면서 배우기도 많이 배우고 업무 감각이나, 여러 방면으로 나의 감각을 깨운 듯한 시간이다. 


  이사님과 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면서, 두 달에 한 번씩 브랜드을 준비한 것을 가지고 상해로 갔다. 그간 16개의 브랜드 스타일을 만들었고, 매번 미팅 때 발전되는 방향을 가지고 가서 pt를 했다. 평소에 일러스트를 주로 쓰다가 포토샵 작업이 대부분이 었는데 포토샵이 능숙하지 않았던 터라. 방대한 자료를 작업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고, 재미있어서였을까. 열정이 가득해서였을까. 이때 기억에 일주일을 거의 밤샘하다시피 했다. 근데 그게 힘들게 못 느꼈던 걸 보면, 할 만했나 보다. 몇 번의 상해 출장 후, 상해 측에서 새로운 프로젝트 요청을 해왔다. 고객사의 PB 상품중 맨즈 라인을 리뉴얼을 해야 하는데, 우리팀이 준비한 형식으로 준비해서 pt를 해달라는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거의 한 달간 프로젝트에 집중했다. 이사님과 나는 둘이서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준으로 디자인을 다양한 각도로 준비를 해서 가져가자. 라고 하셨고, 로고 디자인부터 상품 라인업, 용기, 단상자까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뾰족한 시선으로 보고 풀어나갔다. 준비한 자료를 가지고, 2017 11월 광저우의 고객사 본사에 방문했다. 고객사 대표와 직원들 그리고 우리 회사 사람들 이렇게, 10명 넘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 지금 생각해보면, 신입과 다름없는 내가 그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었다니, 큰 발전이었다. 이사님이 pt하시고 나는 자료를 넘기는데, 이런 자료를 넘기는 것도 센스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이 보고 싶은 것과 듣고 싶은 것을 캐치해서, 자료에 계속 시선을 머무르게 할 것인지, 다른 화면의 전환으로 시선을 전환시키는 것도, 다 중요하니까. 무튼, 갑자기 회의의 분위기는 심각해지더니 이 디자인과 비용적인 문제, 돈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더라. 그렇게 피티하고 돌아오는데 아무래도 이제 3D 디자인할 친구가 필요할 것 같다고 말씀하시자, 문득 떠오르는 건, 같이 제품 디자인과 나온 친구였다. 그 친구도 진해에 내려와서 프리랜서로 디자인하고 있는걸 인스타를 통해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연락해서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설명 한 뒤 제안을 했고, 미팅 일자를 잡았다, 이사님과 미팅하고, 이야기 나눈 뒤 친구도 함께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무급 휴가를 받았다. 사실 이 프로젝트가 잘 되면 지속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잘 되지 않으면 여기서 끝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회사에서는 언제까지 외부에 이렇게 투자할 수는 없고, 눈에 띄는 성과로 이 사업을 지속할 것 인지에 대한 의사 판단이 중요한 시기였다. 지금에야 다 잘됐으니,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글을 쓰지만 그 당시에는 스트레스가 어마 무시했다. 게다가 내 소개를 통해 3D 작업할 친구가 왔는데, 엄마가 친구 오면 나 쫓겨나는 거 아니냐고 우스개 소리로 한 말이, 진짜가 됐다. 친구와 작업해야 하니, 나는 무급으로 2주간 휴가를 보내라는 그 말이 그대로 실행돼서, 아 역시 사회는 당장에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내칠 수 있는 존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랑도 경쟁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드는 사회. 결국에는 서로의 생존이 달려있으니까, 너무 싫었는데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더 비참했다. 결국에는 그전에 퇴사한 회사들도 그렇고, 이렇게 하는 일들 모두. 내가 경쟁력 없으면 언제든지 내쳐진다는 게 뼈저리게 느끼게 됐고, 점점 날이 서기 시작했던 것 같다. 다 같이 웃으면서 일하는 그런 행복 따위 존재할까? 아니. 돈이 없으면, 돈을 벌 수 없으면, 절대. 아무도 웃을 수 없다. 

   그런데, 2주간 쉬고 있는 기간에 이사님이 상해에 갈 수 도 있으니 준비하라는 말을 하셨다. 다음에 생길 일을 미리 예측한 부분은 이사님의 판단이 정확했던 것 같다. 12월 초쯤. 고객사에서 디자인을 선택해서 오더가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왔고, 디자이너가 들어와서 생산을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달받았다. 출국을 2주 앞둔 채. 부랴부랴. 2주 동안 필요한 것들을 챙기면서 출국 준비를 했고, 필요한 서류 및 다 챙기고 부산 집은 친구에게 넘긴 뒤, 출국길에 올랐다.



나는, 

2017년 12월 22일 드디어 상해로 입성했다. 


25일 사무실에 첫 출근하게 되었고, 내 자리는 같이 일하는 팀원이 있는 자리가 아닌, 디자인 팀 자리에 배정받게 되었다. 이방인 한 명이 갑자기 자리 차지 하게 돼서, 눈치를 많이 받았다. 낯선 사람이었고, 호의적이지 않았던 환경이었다. 아마, 갑자기 나타나서는 내가 자기들의 영역을 침범해서, 낙하산 같은 느낌이었겠지. 다행히도 나는 그런 상황에 개의치 않았다. 혼자가 익숙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혼자 충분히 잘 지냈다. 그렇다고 고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매번 중간에 통역하는 친구들이 괴로워했다. 내가 담당한 건 큰 프로젝트 였고,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큰 책임이 따르는 부분이라 부담감도 컸고, 담당자들 모두 예민했으며, 우리는 매번 큰 소리로 소통했다. 그런 환경에서 나는 1년 뒤에 재계약을 바라보며 버텼다. 

  내 목표는 하나였다. 내가 필요한 사람이 되게 만들어서,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 나의 가치를 내가 높일 수 있게 내가 지금 이 현실에서 필요한 것을 충실히 잘해야 하는 것. 그래서 주어진 일 어떻게든 해내려고 했다. 부산에 있을때 늦게 퇴근하던게 몸에 배여서 여기 와서도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면서 마지막까지 사무실을 지켰다. 그리고 여기서 예상치 못한 작업들도 해야했고, 업무와 관련 없는 일도 해야했다. 다른 팀 제안서도 만들어 줘야 했고, 근데 그렇게 계속 해온 일들이 어느 순간 쌓여서, 나를 좋게 평가하고 있었다.(나의 피셜이지만)




이제야 입성한 상해.

그 이후의 스토리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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