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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Nov 06. 2019

어학연수생이 런던에 영어학원을 차렸다!

미스터리(Mr. Lee) #1. 런던, 전생의 고향

어학연수생이 런던에서 어학원 사업을 한다구!     


한 달간의 유럽 배낭여행은 군 시절보다 10배는 힘들었다. 군에서는 삼시 세끼 국과 김치가 제공되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조류 독감이라도 유행하면 횡재였다. 닭백숙이나 닭튀김이 격일로 나오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덜컹거리지 않는 기차에서 잠을 잘 수도 있었다. 비록 소대원과의 집단 혼숙이었지만 편하고 안락한 내무반에서 잠을 잤다. 서무계인 그가 밤에 보초를 나가는 일도 거의 없었다. 낮에는 사무실인 행정반 책상에서 일하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PX로 불려 다니며 접대를 받았다. 훈제 닭발과 고기만두는 최고의 간식거리였다. 당시에도 PX에 전자레인지가 있어서 닭발과 만두를 따뜻하게 먹을 수 있었다. 컵라면은 기본이었다. 거기에다 8천 원의 병장 월급도 나왔다. 물론 담배까지 공짜였다. 그는 행정반 서무계로서 막강한 권력의 맛을 보며 장군은 아니지만 영관급 부럽지 않게 군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럽에서의 한 달간의 여행은 수행을 넘어서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그것도 한 달간 남의 유래일 패스로 여행을 하였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거나 똥배짱이 아니라면 그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정신병자 정도였다. 어떻게 한 달 동안이나 매일 국경을 넘나들며 단속에 적발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도 사실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었다. 유럽의 기차 운영 시스템이 허술하거나 그가 운이 좋아서였을 수도 있다. 둘 다일 가능성이 더 크다.      


한마디로 그는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비록 애지중지하던 캐논은 도둑맞았지만 그보다 소중한 것들을 배우고 돌아왔다. 무엇보다도 군 시절의 서무계의 권력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군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돈을 벌어야만 했다. 돈 없이 한 달간 여행하는 일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이 들었는지 그는 온몸으로 체험하였다. 문제는 돈이었다. 돈 없이도 젊음 하나면 충분히 낭만적일 거라는 환상은 허상이었다. 처절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중간에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공짜로 얻은 유래일 패스가 아까워서라도 한 달을 채웠다. 그것도 숙소가 필요해서 7일 중 6일은 야간 기차를 탔다. 그가 그렇게 독종일 줄은 그 자신도 몰랐다. 행정병이 아니라 해병대에 갔어도 그는 결코 탈영하지 않고 잘 견뎌냈을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즉시 실행에 옮겼다. 그의 신분은 비록 학생비자는 없지만 어학연수생이 맞다. 영국 정부조차 인정해 주지 않는 어학연수생이었다. 그렇다고 학원비를 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런던에 온 이유가 어학연수였기 때문에 신분에 걸맞게 살아보고 싶었다. 지하의 식당 주방에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매일 실컷 먹을 수 있는 다양한 한식의 유혹을 뿌리쳐야만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식 먹으려고 런던에 그 고생을 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한식은 한국에서 평생 먹을 수 있다.”     



그의 깨달음은 원효나 달마의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부처님의 깨달음에 비견될 만큼 그에게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전환점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나머지 6개월은 영어도 제대로 배우고 다른 방법으로 돈도 벌어보기로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삶의 방식과 고정관념을 깨야만 했다. Queens park 할아버지 댁에 있던 짐부터 옮겨야 했다. 하지만 이사 갈 집도 정하지 못하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머지 6개월을 더 살아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유럽에서의 한 달의 경험은 안주하는 삶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기라고 판단되었다. 두 번 다시 런던으로 어학연수를 올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나머지 6개월을 더 살아도 좋다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부탁(?)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대신 가끔 와서 정원 잔디도 손질해 드리고 BBQ 파티도 같이 하자는 약속을 남긴 채 떠나왔다. 고마운 분들이었다. 그분들은 그를 이미 자식이나 손자처럼 생각하고 계셨다. 짐을 옮긴 것은 그날로부터 1주일 후였다. 그는 1주일 만에 새로 살 집을 구하였다. 그리고 영어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같이 살 룸메이트도 구하였다. 룸메이트를 구하는 방법은 상상을 뛰어넘는 그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방법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보기 좋게 성공했고 권력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하였다. 뭐가 돼도 될 놈이 이 정도쯤이야! 라며 거들먹거리기까지 하였다.      


런던 시내에 Bond street와 New Bond street라는 거리가 있다. 영국에서 명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번화한 거리다. 런던 최고의 번화가인 Oxford street의 서쪽 편에서 Marble arch로 향하는 거리 쪽으로 조금만 걷다 보면 남쪽으로 길게 난 명품거리가 나타난다. 이 거리는 Picadilly street까지 늘어져 있다. 영화 킹스맨에서 나왔던 그 유명하다는 양복점도 근처에 있다. 그 거리 중간에 비달 사순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용학교가 있다. 요즘은 토니 앤 가이가 대세지만 그 당시만 해도 비달 사순의 명성은 대단하였다. 그는 그 비달 사순이라는 미용학교에 가서 룸메이트 구함이라는 광고지를 붙인 것이다. 원칙적으로 광고는 학생들만 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법대로만 산단 말인가! 일단 붙이고 본 것이다. 때면 또 붙이면 그만이다. 광고 조건이 파격적이었다. 어처구니없는 룸메이트 구인 광고를 부치고 나오면서 그는 습관처럼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전기에 감전될 때처럼 파르르 떨었다.     


“룸메이트 구함! 성별과 나이는 상관없고 방값은 공짜다. 단 생활비는 각자 부담한다. 인문학을 전공한 미국인이면 더욱 환영한다.”      



그의 계획은 이랬다. 일단 1주일 안에 두 사람이 살 수 있는 가능하면 큰 방 하나를 구한 다음 싱글 침대를 두 개 사는 것이다. 방 가운데는 체러티 샾에 가면 널려있는 제법 두툼한 커튼을 사서 달 생각이었다. 그러면 방을 공유하면서도 잘 때는 각자의 개인 룸이 되는 것이다. 2층 침대도 생각하였다. 하지만 유럽여행에서의 도미토리형 게스트 하우스의 악몽 때문에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한방 생활이 불편하겠지만 서로 마음만 맞으면 재미난 생활이 될 수도 있다고 그는 확신했다. 확신의 근거는 그만 아는 촉수였다. 뭐가 돼도 될 놈이 그 정도쯤의 촉수도 없어서야 라는 것이 그 근거였다.      


미국인을 선호한다는 내용은 더 이상 영어 학원을 다닐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본격적인 영어 학원을 차려볼 생각이었다. 그의 첫 비즈니스 파트너는 반드시 미국인이어야 했다.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었다. 그 파트너가 룸메이트면 일은 훨씬 쉬어진다. 이미 가르칠만한 타깃도 정해져 있었다. 한 달 동안 유럽을 떠돌며 생각해둔 아이디어가 있었던 것이다.      


방은 Elephant and Castle이라는 우범지역에 구했다. 밤이면 경찰이나 구급차 소리가 끊이지 않는 런던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 중의 한 지역이다. 그래서 도심인데도 싼 방들이 가끔 나온다. 비달 사순과도 멀지 않다. 학생들 중 총 12명이 룸메이트 신청을 하였다. 그중 절반은 여자였다. 상당한(?) 고민이 있었지만 일단 여자는 탈락시키고 남자 6명 중 2명으로 압축시켰다. 그중 한 명을 최종 면접을 통해 선발하였다. 면접 방법은 물론 새로 살 집으로의 초대였다. 얼굴도 처음 대면이다. 새로운 룸메이트도 만족해야만 같이 살 수 있다. 새로운 룸메이트에게 가장 큰 메리트는 방값을 내지 않고 산다는 점이다. 런던에 살면서 생활비중 방값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 이상이다. 그래서 지원자가 몰린 것이다. 다행히 그는 6개월간 Queens park 할아버지 댁에서 공짜로 살면서 3개월분의 방값을 모아두었다. 나머지는 유럽여행에서 사용하였다.     


시차를 두고 서류전형에서 통과된 2명이 그의 집으로 방문해 면접이 이루어졌다. 최종합격자는 그보다 세 살 어린 빅터라는 친구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미용을 배우기 위해 온 심리학도였다. 심리학과 출신의 꿈은 세계적인 미용사가 되는 것이었다. 미용을 하며 전공인 심리학을 어떻게 적용하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빅터와 그는 한방에 살면서 금방 친구가 되었다. 다행히도 빅터는 많은 일본 친구들이 있었다. 이점이 그가 두 사람의 방문 면접에서 빅터를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심리학은 사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다. 빅터 덕분에 금요일과 토요일은 일본 친구들과 파티를 즐겼다. 그는 얼떨결에 그 파티에 따라다녔다. 파티는 자기가 먹을 음식과 술을 준비해 와서 같이 나누어 먹고 노는 것이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이야기도 하고 노는 것이 파티 방식이다. 따라서 파티 주최자도 전혀 부담이 없다.    

  

파티에 따라다니며 돈을 벌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일단 빅터와 좀 더 마음을 터놓고 진솔한 대화들이 필요하였다. 다행히 빅터도 맥주를 좋아했다. 빅터와 그는 밤늦도록 토론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 또한 돈이 필요하였다. 미국도 영국처럼 만 18세가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나온다고 한다. 그 독립은 경제적 독립도 포함되어 있다.      


운명의 토요일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런던 리젠트 파크 바로 위에 위치한 세인트 존스 우드라는 부자 동내에서 파티가 열렸다. 그 아파트는 수영장이 딸린 호텔 형 최고급 아파트였고 그 집에 사는 주인은 일본인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인 3세였다. 한국말은 전혀 못하지만 자신의 피에 한국인의 피가 섞여 흐른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름은 “하야시”였다. 한국 이름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선물로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가 군 복무 시절 시어머니처럼 싫어했던 그의 직속상관이었던 인사계 이름을 선물한 것이다. 그 이름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재수 없는 “재수“였다.     


하야시는 빅터와 이미 친한 친구였다. 그날 저녁에도 10명이 넘는 일본 여자들이 파티에 참석하였다. 역시 하야시는 통이 컸다. 그는 돈이라는 권력으로 자유롭게 살고 있었다. 그것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런던의 부자동네에서 말이다. 그 파티에서 느낀 점은 일본 여자들이 영어를 못해도 너무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 여자들의 꿈은 대부분 1년간 영국에서 영어를 배우며 놀다가 미국으로 미용 유학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전에는 학원에 다니지만 재미없어서 잘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촉수는 빠르게 더듬거렸다. 그는 파티 도중 엉뚱한 제안을 한다.  하야시의 일본 친구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겠다는 것이다. 그는 간단한 플랜을 설명하였다. 그 일본 여자들은 어학원 다니는 것조차 버거워할 정도로 영어와 거리가 멀었다. 가장 기초적인 것들부터 가르치려는 플랜은 오래전부터 생각하던 그만의 방식이 있었다. 그래서 룸메이트도 미국인을 선호한다고 광고를 냈고 실제로 미국인을 만난 것이다.      


즉, 기초적인 문법은 그가 맡고 실질적인 회화는 빅터가 맡기로 했다. 중간에 문제가 생기면 하야시가 통역해 주는 것으로 해서 그날 바로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파티 도중이어서 거실에서는 파티가 계속되었고 다른 방에서 관심 있는 세 명의 여학생을 상대로 개인 과외처럼 수업이 이루어졌다. 물론 그날은 무료 서비스였다. 문법이라면 한국에서 치가 떨리도록 공부했던 그였다. 런던 랭귀지 스쿨의 선생들도 그 앞에서 문법 이야기를 잘하지 않을 정도로 문법에는 도사(?)였다. 안타깝게도 문법만 그랬다. 영어라는 언어가 문법을 공부하면 할수록 말은 더욱더 입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그의 영어는 한마디로 형편없었다. 형편없는 그가 영어를 가르치자 여학생들은 신기하게도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가끔 빅터가 들어와서 원어민 발음으로 한 번씩 바로잡아 주었다. 수업이 끝나고는 자연스럽게 맥주를 마시며 프리토킹 시간도 가졌다. 그녀들은 3명 모두 흡족해하였다.  

    

3명의 여학생 모두 정식으로 배우고 싶다고 하였다. 장소는 하야시가 1주일에 2번 제공해 주기로 하였다. 어차피 방 3개 중 2개는 항상 비어있었다. 역시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은 그도 절반은 한국인이라는 의미다. 그렇지 않았으면 아무리 빅터의 룸메이트라고 해도 그렇게 선뜻 자리를 제공해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중에 한번 주말에 한번 하던 수업이 매일로 바뀌었다. 입소문은 순식간에 일본 여학생들 사이에 퍼져 나갔고 최대 20명까지 수강생이 늘어났다. 1인당 학원비는 일반 런던 시내 어학원보다 조금 높게 받았다. 이유는 학원이라기보다는 그룹 과외라는 개념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원비를 낮게 책정하면 그를 우습게 볼 것 같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들은 돈이 많았다는 점이다.

수입의 30%는 빅터에게 주기로 하였다. 나머지 70%는 그가 챙기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하야시는 돈을 준다고 해도 싫어했다. 그는 더 이상 돈이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대신 자기 집에 매일 또래의 여자들이 드나드는 것이 그의 가장 큰 기쁨이자 낙이었다. 그 여자 중 하나와 사귀었고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된 것도 어쩌면 그의 안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올 때,  하야시는 그를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하였다. 그리고 준비해둔 봉투와 선물을 내밀었다. 물론 하야시의 옆에는 귀엽고 예쁜 여자 친구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 봉투에는 은행에서 방금 찾아온 듯한 50파운드짜리 지폐가 20장이나 들어 있었다. 천 파운드면 그 당시 환율로 이백만 원정도 되었다. 역시 통근 하야시였다.     


영어의 본고장인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영어를 형편없이 하는 한국인 어학연수생이 영어 학원을 차린 것이다. 물론 세금도 내지 않는 불법이었고 광고도 없는 개인 과외처럼 진행되었지만 그가 챙긴 수입은 놀랄만하였다. 그는 6개월 후에 돌아가기로 하였지만 6개월을 더 채워 1년 후에 돌아갔다. 어학연수생이 제법 큰돈을 벌어 돌아갔다는 사실 자체도 재미있었고 그가 영어를 배운 방식도 재미있었다. 영국에서 미국 영어를 배울 수 있었던 것도 빅터와의 동거 때문이었다. 그가 한국에 와서 아직도 심리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그 시절 빅터에게 영향을 받아서일 것이다. 그는 지금도 하야시와 빅터를 그리워한다. 샌프란시스코라는 단어만 나와도 빅터가 금방이라도 달려올 것만 같다. 청개구리와 같은 삶을 살기 시작한 것도 젊은 시절 런던에서의 1년 반의 독특한 경험 때문이었다.





나의 브런치에 올려진 모든 글들은 [하루만에 책쓰기]로 써서 별다른 퇴고 없이 올려진 글들이다. 
참고로, [나는 매주 한권 책쓴다]란 주제로 정기 강의를 하고 있다. 월출산 국립공원에서는 매주 수요일 14:00~16:00, 서울 선정릉에서는 매주 금요일 19:00~21:00다. 글쓰기와 전혀 상관없는 일반인들이 [하루만에 책쓰기]를 통해서 실제로 매월 또는 매주 한 권 책을 쓸 수 있도록 고정관념을 적나라하게 깨트려주는 강의다. 실제로 필자처럼 매주 한권 책을 쓰는 회원들만 20명 이상이다. 매월 한 권 책을 쓰는 회원들까지 합하면 100여명 이상이다. 그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수강신청은 온오프믹스닷컴에서, 월출산 상시 강의 문의는 010 3114 9876의 텍스트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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