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를 시작한 게 작년 2022년 2월부터인 데 그때는 책을 읽다가 몇 글자 남기는 정도였다. 그런데 작년 어느 시점에서 필사를 제대로 하게 되었다. 평소 필사를 하고 싶었는데 글씨가 악필이어서 쓰더라도 이쁘지가 않으니 쓰다 말다 했었다. 그러다, 손글씨 연습 책을 하고 난 후 자신감이 붙어서 쓰기 시작했고 그러다 다꾸라는 다이어리 꾸미기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필사 노토를 별도로 꾸미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것을 굳이 좋아하지 않는 데 막상 직접 재료로 노트를 꾸미니 만드는 과정에서도 만족스럽고 결과물도 흡족했다(물론, 잘해서가 아니라 완성했기에). 손으로 직접 만드는 과정이 심리적으로 안정을 준다는 데 직접 겪어보니 설명할 수 없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필사가 시작되었다.
필사 도서는 기존에 읽었던 도서로 했는데 그 이유는 제독함으로써 더 그 문장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사를 하면서 이미 읽었던 책인데도 다르게 다가온 문장도 있었는데 문득, 고전을 읽을 때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을 읽으면 그때마다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필사하면서 느끼게 되었다. 단순히, 글자를 쓰는 게 아니라 내 사고를 더 넓게 만드는 게 '필사'였음을 새롭게 알았다. 조선 시대 양반 가문에서 서예를 자주 하는 모습을 보곤 하는 데 그 배경엔 늘 자신을 고찰하려는 모습이 있었다는 것. 전에는 그 장면을 봐도 이해가 안 되었는데 필사를 하다 보니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위안을 주는 문장이 있다. 인덱스로 표시를 하고 덮기만 했는데 필사를 하면서 다시 한번 기억을 하면서 더 깊이 뇌리 속에 남는데 글이 아닌 감정으로 스며든다. 인쇄 기술이 발달하기 전엔 오로지 필사로 책을 읽을 수가 있었다. 여기서 난 독자보다 필사경의 마음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지금과 같은 대중 소설보단 성경과 문헌 그리고 문학 위주로 했을 텐데 글을 쓰면서 본인에게도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 필사경 뿐만 아니라 책 표지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 삽입된 그림 등등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서 고급 인력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책의 가치는 더더욱 높았다. 하지만,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필경사를 비롯한 그 외 사람들은 서서히 직업을 잃어갔는데 문득, 필사가 이들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단, 전자는 전문성과 직업이고 후자는 취미라는 차이뿐이다.
더 나아가 필사를 하면서 다이어리를 꾸미게 되었다. SNS에서 다꾸 만드는 영상을 보면 정말 경이롭다. 뚝딱하고 하나의 작품이 완성이 되는데 많은 글이 없어도 무엇을 표현하는지 알 수가 있다. 포토샵의 스프레드처럼 하나하나가 겹치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다이어리 꾸미기. 미흡하지만 이것도 같이 하고 있다 마치, 필경사의 글을 더 빛나게 하는 이들처럼 말이다. 시작은 그저 좋아하는 문장을 남기고 싶었는데 필사를 하다 보니 생각의 시야가 조금은 더 넓어지고 또 다이어리를 직접 꾸미다 보니 만드는 과정에서 안정감을 갖게 되었다.
참 신기하다 난 그저 필사를 시작했을 뿐인데 이 시작이 마음과 생각을 조금씩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나에겐 필사가 변화의 씨앗이었지만 다른 이에겐 다른 경로가 새로운 씨앗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새로운 도전에 머뭇거리지 말고 한 발작 움직여 보라는 말의 의미를 알게 다시금 알게 된 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