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 기술 회의를 해본 적이 없는 통역
민박집은 우리 외에 손님이 없었기 때문에 남은 숙소를 들어오는 직원들을 위해 비워 두었고 소장은 호텔에 머무는 것으로 회의 일정이 완전히 준비되었다. 아직 업무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기술 용어 암기와 더불어 계약서 프랑스어 원본을 파악하고 공무업무를 병행했지만 각 파트 별 공구장들의 회의 통역에 무리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공구장들이 회의 때 하는 말이 모두 영어였기 때문에, 영어 전문 용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면서 불어로 옮기는 것은 웬만한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내 능력으로서는 무리라는 판단에, 보다 전문적인 통역이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다행히, 현대 건설과 대우 인터내셔널과 컨소시엄으로 맺은 계약이라 전문 통역들이 두 명이나 있었다.
그들이 회의를 주재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참관으로 진행상황을 보조해주면 되었다. 그러나 어디에서 터질지 모르는 지뢰에 대해 늘 조심하고 있던 터였다. 그 지뢰는 발주처의 위임을 받은 알제리 국영기업 소넬가즈의 자회사로 전기, 가스 엔지니어링 회사의 프로젝트 매니저로부터 벌써 빨간 불이 켜진 상태였다.
지금까지 내 불어 능력으로 위기에 처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젊은 발주처의 모하메드는 자신이 프로젝트 매니저라는 것을 앞세워, 직위와 위치를 확고히 하려는 야심이 만만찮아 보였다. 그는 다른 발주처의 엔지니어들이 대화를 하려는 의도에서 벗어나, 마치 우리나라의 지연, 혈연, 학연을 따지 듯한 고자세로 내 자질과 능력이 아닌 불어 실력을 문제 삼고 나섰기 때문에, 속으로는 곤혹스러우면서도 칼자루를 쥔 그를 피해 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길에서 그를 대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비추어보면, 그런 류의 갑질 하려는 발주처에게는 답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위치에 비해 실력에 걸맞은 사람을 원하는 것보다 자신의 비위를 맞춰줄 사람을 원했고, 실력 있는 사람을 만나면 우회적으로 자신의 직위를 이용하는 전형적인 갑질의 대명사로 보였기 때문에, 나는 그의 의심의 눈초리와 경계심에 개의치 않았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내가 고졸 출신임에도 고용해준 현대엔지니어링의 프로젝트 매니저였고 같이 일하는 직속상관 이 부장이었다.
현장 근처의 순박한 얼굴의 목동이 양털을 깎고 있다.
정 주영의 중동 신화와 삼성 중공업의 착취만 알고 있던 내게, 현대엔지니어링의 학연과 지연 타파는 처음부터 신선했지만 사무실에서 나를 대하는 모습에서도 권위 의식이나 압력은 찾아볼 수 없어서 한국의 기업문화에 대한 신선한 충격과 더불어, 첨단의 시대를 맞이하는 시대에 바람직한 회사 상이라고 받아들이며 자부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프로젝트 매니저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은 곧 내 실력의 부족함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 부장과 나는 기술 회의를 위해 알제 공항으로 들어오는 공구장들을 영접하고 호텔과 민박집으로 이동해서 시끌벅적한 환영 파티를 했다. 사무실에서 보았던 각 공구장들이 회의를 위해 들어왔고 김 소장의 절대적 신임을 얻고 있는 용 부장이 선발대에 합류해서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역할로 알제에 남아 있을 거라는 소식을 알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