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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ssoud Jun May 14. 2019

Inpex 프로젝트

대우조선해양 1: 비리와 Inpex Ichthys PJT



*** 세계적인 빅 패밀리, 프랑스 외인부대



 어제 통화에서 그는 제 1외인공병연대 중대장으로 제대했다고 말했고 육군사관학교 출신이 아닌 ROTC라고 설명했었다. 나보다 5살이 많았다. 내가 입대할 즈음 그는 제대했다고 했다.


프랑스 외인부대 제2외인보병연대 대전차 중대. 아프리카 지부티, 아쌀 소금 호수


 나는 그에게 한국으로 돌아온 배경과 알제리를 가기 위해 프랑스어 통역 일자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외인부대를 불명예제대하는 과정과 ‘품행 방정 증명서’를 받지 못하게 된 배경,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으나 중위를 비롯한 다섯 명의 질문 방식과 대화에 대해 심각한 오류가 있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때가 4년 4개월 차 근무였을 때였고 영창을 40일 연속 세 번을 살았을 때, 아버지 사망 이후 끝없이 이루어진 반항과 명령 불복종의 결과라고 솔직히 말했다.

 

 그 지경에 이르게 된 배경에는 3년 6개월 차 근무 때, 두 다리 수술을 마치고 체력 회복을 위해 연대 헬스클럽에서 뼈를 깎는 고통의 훈련을 거듭하고서, 내 요청에 의해 전투 중대로 들어간 곳이 대전차 중대(CAC)였고, 중대장이 외인부대원이 3년 근무면 신청할 수 있는 권리인 ‘RSM(군인 신분 합법화)’신청을 직권남용으로 거부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행정병과 교육을 4개월 동안 받으면서 느꼈던 문제는, 모든 행정적인 절차를 1년 안에 해야 하는데 외인부대는 직무유기로 3년으로 늦췄고(탈영, 징계 등의 이유로), 운영할 수 없는 영창까지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되면서 외인부대의 비밀스러운 운용이 들통나 여론의 뭇매를 맞고 난 뒤였다.

 

 외인부대가, 외인부대원에게 비밀로 간직할 것을 행정 병과 교육할 때 시킨 것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근무할 때는 몰랐고, 의가사 제대 후에, 프랑스 영주권을 받지 못하자, '품행 방증 증명서'가 어떤 위력을 갖고 있는지 알게 된 배경에는 중대장의 직권 남용과 그것이 외인부대원들에게만 적용된 차별의 대가라는 것, 그리고 족쇄였던 것을 해결을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면서 알았다.


 내 얘기를 다 들은 로랑은 당시의 중대장과 프랑스 국방부를 대신해 내게 사과했다. 그것은 분명 직권남용이었으며, 프랑스 육군사관학교의 카르텔이 작용한 심각한 범죄라고 인정했다. 또한, 프랑스의 인권은 워낙 강해서 프랑스 군 인권센터에서 필히 내 명예를 회복시켜 줄 거란 걸 의심하지 않았다.


 로랑은 내게 대우에 통역 자리를 알아봐 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나는 국내의 한국 회사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 오롯이 갑질 때문이었고 알제리를 가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는 자신과 함께 안전 감독관으로 일하자고 제의했지만 같은 이유로 거절했다. 한국에서의 급여가 얼마인지 물어보지도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내가 알제리를 가야 하는 이유는 월급이나 대기업 등의 이유가 아니었다.


 알제리는 내게 새로운 잠재력을 발견해준 코디네이터라는 업무에 대해 배울게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로랑은 또 다른 외인부대 대위 출신인, 자신의 동료가 알제리에서 일하고 있는 안전 매니저를 소개해 주었지만 안전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한국에서 안전이란 것들이 하는 짓이 가소롭고 어이없었다. 숨어서 사진을 찍어 시공사를 핸들링하거나, 일하다 보면 안전에 대해 깜빡 잊어먹을 수밖에 없는 업무 구조상, 시공사의 안전 요원들이 작업자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데, 돈만 받아먹고 안전은 뒷전이라고 비난했다.


 시공사의 안전감독관들의 교육은 기본적인 상식을 가르치는 기본 교육과 현장에서 일어나는 안전에 대한 현실이 너무도 달랐다. 작업자들이 일하는 곳은 엄청난 분진가루와 쇳가루, 먼지, 소음과 인지할 수 없는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는 곳이었다. 회사에서 지급하는 값싼 보안경은 그러한 먼지를 예방할 수 없었고 마스크를 쓰면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대부분 등산용 스카프를 사용했다. 그것도 거의 임시방편이었지 주변에 페인트 작업을 하는 곳에 가면 독성 냄새에 머리가 아프고 속이 매스꺼웠다. 더욱이 작업 전, 주변 안전을 확인하고 대처를 해도 작업 중엔 주변 환경의 변화를 거의 인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관리들이 와서 주변을 확인하는 것이 절차상 유익한데도 모든 안전 관련 책임을 작업자들에게 떠 넘기고 있는 실정이었다.

 

 거기에 더해, 공정도 신경 써야 했고 일일 보고서도 작성해야 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멀티 플레이어였다. 안전은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고 사고가 발생하면 작업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그런 교육을 미리 시켰는데 왜 주의하지 않았느냐'


 는 책임 추궁이 들어왔다.

그들의 존재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작업자들이 안전까지 모두 정리하면 그들이 현장에 존재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장의 여러 소음들에 의해 끼고 있는 귀마개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어도 멀리서 오는 위험은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기 때문에, 반장 이하 직장과 현장 공정을 책임지는 관리들이 공정과 품질, 안전까지 신경을 써는 것이 당연한 절차였음에도, 책임은 작업자에게 돌아왔다.


 안전 교육을 받을 때의 일화를 지적하며 안전 감독관의 자질을 질타했다. 더욱이 자격증도 없이 단지 경력과 인맥으로 안전관리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특히, 선주 감독관은 영어만 잘해도 거액의 월급을 받고 들어갈 수 있었다.


 로랑에게 작업자의 잦은 교체로 인한 작업 지연, 현장에서 일어나는 관리자들에 의한 보조공 인권 유린, 상호 협력 부재와 존중, 책임감, 책임 전가 등의 문제와 해결책에 대한 의견을 전달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너무나 충격적이었던 조선소의 작업 문화, 존중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성심 성의껏 일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얘기했다.


 그의 안전 매니저라는 직함은 선주사 측면에서 전체적으로 볼뿐, 디테일하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 수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말했고 그는 세심하게 들었다.




반장이라는 관리자는 모두 서 있고 노동자는 모두 바닥에 앉혔다. 사고가 났다고 휴업을 결정하는 자리였다.



 내가 첫 출근을 했을 때, 이치스 프로젝트 전체 안전 조회가 있었다. 현장 넓은 공터엔 각 협력업체 별로 간이 의자가 놓여 있었다. 당연하게, 군대처럼 오와 열을 맞추어 땅바닥에 주저앉아 안전교육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나는, 의자가 놓여 있는 광경에 감탄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지시를 내렸을까 궁금했고, 로랑이 선주사 엔지니어들과 한국인 모든 구성원들을 모아 놓고 행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터였다. 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어날 수 없는 이런 조치는, 그 어떤 선주사도 시도하지 않았던 특별한 대우였다.


 협력 업체 직원들로부터 작업자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를 가지고 와서 오와 열을 맞추어 놓은 사람들은 관리자들이었다. 그 어떤 작업자도 땅바닥에 앉지 않는 모습을 처음 경험했던 것이다. 현장 노동자들은 땅바닥에 앉는 것을 한국의 문화라고 했지만 의자가 있으면 의자에 앉았다. 노동자들은 또한 방바닥에서 자는 것을 한국의 온돌 문화라 하면서 언제든 떠날 수 있게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이불과 베개만 필요한 현장이라 했고 그것을 ‘문화’라 했다. 그러면서 침대가 있으면 백의 백 침대를 썼다. 그것은 문화가 아니라 스스로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될 만큼 스스로의 가치를 낮추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로랑은 업체 직원들에게 지시하여 의자를 가져오게 해 안전교육을 받게 했다. 이러한 조치를 존경했다. 노동자들은 그런 조치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가치도 없이 무관심 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가끔씩 이방인 같은 자세로, 그들에게 땅바닥에 앉는 것이 포로나 노예 문화,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변명이라고 강변하면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 했다. 사람을 일렬로 세워 인원 확인을 하는 군대 문화의 전신에 이어, 땅바닥에 사람들을 앉히면 나는 뒤로 나가 서 있었다. 그러면 직원이 가서 땅바닥에 앉으라 명했고 땅바닥에 앉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언제나 나의 패배로 끝났다. 나는 왕따를 당했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현장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투철한 직업의식도 책임감 있는 보조공의 모습도 아닌 뜨내기 같은 모습으로 밥을 먹으러 일하러 왔는지 일을 하고 밥을 먹는 것인지 다른 작업자들의 눈에 이상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처절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 중에서, 나사 하나 풀린 사람처럼 빈둥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일하는 것 같기도 한데 애매한 내 행동이 사람들의 험담 소재가 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조선소의 시스템에 적응한 듯 반항하는 모습이었지만 주변인들이 보기엔 빈둥거리듯 행동이 애매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다른 작업자들에 비해 일사불란하거나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 눈에 띄는 것은 사실이었고 그렇다고 일을 안 하는 것도 아니라서 간섭하기도 애매했다. 일하는 것도 처음 하는 일이라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고 작업이래야 작업자 옆에 서서 필요한 공구나 집어 주는 거라 어려운 것은 없었다.


우리는 다음 기회에 그의 아내와 아직 돌이 되지 않은 딸을 보기 위해 신축 공사 중인 집 초대에 응하며 헤어졌다.




*** 대우조선 이치스 프로젝트


2017년 7월 17일, 장장 8년에 걸친 공정을 끝내고 떠나는 이치스 FPSO, 로랑이 찍어서 보내 준 사진이다.



 프로젝트는 대부분 헐 파트에서 진행되었다. 부유식 생산설비로 336미터의 길이로 제작되는 배는 선체 부분과 톱사이드 상부구조물 부분으로 크게 나누었고 대우조선해양의 자회사인 중국의 DSSC(산동 유한공사), 삼우중공업, 신한기계에서 관로선반, 플레어 타워, 근로자 거주구역을 따로 만들어 대우 조선에서 결합하는 방식의 턴키 사업이었다. 대우 조선에서는 2007년 전에 프랑스 토털사의 파즈플로에 이어 두 번째로 큰 2조가 넘는 대공사였다.


 우리 팀은 선체 내의 배관 설치 작업에 투입되었다. 선체는 상부구조물에 비해 나갈 곳 없는 먼지와 용접에서 나오는 연기들이 뒤엉켜 숱한 기계음과 굉장한 소음들을 내면서도 각 협력업체들은 철저한 관리로 인해 하나씩 공정률을 보이고 있었다. 현장에서 일하는 것은 흥미로웠다. 다양한 직업군들이 마찰 없이 진행하는 이런 공정이 이만큼 발전하기까지의 시행착오 속에 쌓인 노하우가 궁금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일당 받고 일하는 물량 팀들은 맡은 바 물량을 쳐내면 그만일 뿐, 그런 관심은 먼 나라 얘기였고 오히려 나는 그런 과정들을 궁금했다.


 현장 일은 관심이 있는 만큼 흥미로웠다. 내가 있는 위치가 어디쯤일지도 모르는 광범위한 공간 내에서 작업에 빠져 있다 보면 아무런 잡념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 인원들이 모여, 거대한 배가 만들어져 인생에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는 것은 노동자로서도 보람 있는 일임에 분명해 보였다. 동환이와 같이 배정된 반원들은 처음에 죽이 잘 맞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팀장이 반 끼리 경쟁을 시키고 오늘은 누가 잘하고 못하는지를 공정을 앞당길 수 있는 동기부여로 생각하는 모양인지 경쟁을 부추겼다.


 중요한 것은 전체적으로 이들의 작업 환경, 즉, 상명하복의 절대적인 명제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작업자 일하는데 가만히 서 있는다거나 잠깐이라도 휴대폰을 보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팀은 같이 일하던 동생에게 나에게 군기를 잡으라고 시켰고 착하던 동환의 잔소리가 심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신입 몇 명이 배관 야적을 위해 2주 동안 야간작업에 투입되었는데 저녁 8시부터 아침 6시까지 일반 공수의 1.5씩 지불된다고 했다. 어차피 처음 하는 일에 기술도 없던 나는, 일당 10만 원에 3주 동안 이어진다는 야간작업에 동참했다. 작업은 배가 올려진 도크 야적장에 있는 배관 자재들을 배 안으로 크레인을 이용해서 옮기면 그것을 배 안에서 받아 설치되는 각 장소로 이동시키는 간단하지만 힘든 작업이었다.


 배가 원체 컸기 때문에 타워크레인을 운용하는 기사와 신호수들이 조를 맞추어 작업은 착착 진행되었다. 신호수들이 한 번씩 작업을 끝낼 때마다 옷에 먼지가 묻었는지 툭툭 털었다. 깨끗하게 다려지고 각이 잡힌 옷에 행여 먼지라도 묻을세라 털어내고 또 털어내는 모습이 웃겼다. 정말 멋있어 보이던 그들이 추해 보였다.


 3주로 예정되었던 야간작업은 2주 만에 끝났고 야간 조도 각자 반으로 돌아갔다. 다시 주간 반으로 들어가 작업을 하던 때에, 나와 동환에게 특별한 업무 지시가 떨어졌다. 배 제일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고여있는 철 가루를 청소하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든 상관없었지만 일을 하다 보니 철 가루 먼지가 심하게 올라와 역겨워서 숨을 쉬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나는 먼지에 민감해서 일반 보안경을 착용하지 않았고 마스크도 이중으로 끼고 있었는데도 냄새가 역겨웠다. 둘이 할 일이 아니었는데 둘에게만 시켰다. 하루 종일 해야 할 작업이었는데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역한 냄새였는데도 동환은 묵묵하게 일했다.


“동환아, 나 밖에 가서 담배 한 대 피고 올게, 같이 안 갈래?”


“형 혼자 다녀오세요. 저는 마저 계속할게요”


 동환을 남겨두고 혼자 나와 신선한 공기를 마셨다. 마침 비도 오고 먼지 없이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멀리 있던 다른 팀 사람들이 나를 보며 시시덕거리면서 수군댔다. 옆 방을 쓰던 나이 어린 동료들이었다. 눈치 보지 않고 조금 더 여유를 갖고 담배를 피우곤 현장에 복귀해 다시 청소를 마저 끝냈고 일과도 끝이 났다. 문제는 다음 날 일어났다.


“형님, 다른 사람들 열심히 일하는데 형님 혼자 게으름 피운다고 말들이 많습니다. 주의 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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