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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ssoud Jun Oct 02. 2019

대우조선해양의 도둑들

면접, 그리고 부도덕한 대기업들



*** 면접



 마침 알제리로 가는 대기업에서 면접 제의가 들어왔다. 알제리 복합화력 발전소에 프랑스어 통역으로 이력서를 넣었던 것이 면접 날짜가 잡혔다. 여행 삼아 지리산과 설악산을 다녔다. 로랑에게 면접 후, 결과를 알려주기로 했다. 나는 산과 바다로 산행과 낚시를 다니며 생각을 정리하고 면접에 임했다. 연봉은 실수령 1억을 요구했다.


 현장의 각 공구장이나 엔지니어가 하는 말을 전하는 일은 너무 아마추어적이며 수동적이어서 일하는 것 같지 않았다. 더욱이 통역이라는 직책이 전해주는 한정된 업무가 내 적성엔 맞지 않았다. 코디네이터를 강조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때까지 한 번도 알제리에서 프로젝트 수행 경험이 없었던 현대 엔지니어링은 실무자들 면접에 프랑스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면접관이 면접을 진행하지 않고 직원 중에 불어 전공을 한 젊은 여자가 면접관으로 나와 프랑스어를 하니 알아 듣기 힘들었다. 다른 대기업에선 하청 업체에게 위임해서 직원을 뽑는 것에 비해 현대엔지니어링이 직접 채용공고를 내고 직접 면접을 보는 것이 신선했다. 나는 될 것 같다는 옅은 희망이 있었다.


 그때까지 면접을 보아서 한 번도 탈락해 본 적이 없었다. 잘 배운 사람들도 부럽지 않게 자신이 넘쳤던 이유는, 어차피 사람이 하는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지 기술을 가진 자의 오만한 발주처의 갑질 사이에서 코디네이션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었다. 어차피 프랑스어는 할 줄 아는 것이니!

 대기업 면접은 처음이었다. 법관들처럼 면접관들이 높은데 앉았고 응시자들이 5명 정도 동시에 면접을 보았다.


“프랑스 외인부대에서 행정을 하셨으면 행정에 대한 노하우가 있겠군요?”


젊고 아름다운 여자 면접관이 물었는데 노하우인 프랑스어 발음을 이해하기 힘들어서 되묻자 조심스럽게 다시 말해 주었다.


“아! 사보아 페어(노하우)말이군요. 그럼요, 그럼요! 컴퓨터 화면 앞에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 질리죠. 그러면 한 번씩 밖으로 나가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담배도 한 대 피고 산책도 좀 즐기다 와서 다시 집중하면 업무가 원활해지겠죠! 일도 안 풀리는데 눈치 본다고 의자에 앉아 있으면 스트레스만 쌓이고 업무 결과는 좋지 않다고 봅니다.”


내가 겨우 알아듣고 불라 불라 설명을 하니 같이 면접에 참여한 경쟁자들이 웃었다. 피엠인 부장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설명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다른 질문에 묻어 가버렸다. 피엠이 나중에 다시 내게 질문 하기를 ,


“지금은 좀 이른 시기인 것 같아 6개월 정도 더 기다려야 하는데 그때까지도 기다려 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현장에서 통역으로써 가장 필요한 업무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제가 다른 일을 하지 않으면 기다릴 수 있습니다. 현장에서는 업무상 필요한 미팅을 발주처 쪽 사람들과 하는 횟수를 줄이게끔 제가 중간에서 조정자로써의 역할을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봅니다. 통역을 하는 것은 수동적이지만 코디네이션을 통해 우리가 가진 문제점을 파악하고 발주처의 문제를 인식하고 현장을 다니면 자연스러운 대화를 통해 풀리는 문제들이 많습니다. 알제리 사람들은 느리고 여유롭게 일하는 사람들입니다만 발주처에서 지정하는 국영기업체인 에트르킵이나 이네르가와 한국 건설업의 선두주자인 현대 스타일의 업무가 만나면 제가 맹세하건대 비정상적인 충돌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현장의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발주처와의 의사 소통과 업무 절차에 대한 원할한 코디네이션입니다. 불어를 잘해서 완벽한 의사전달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저 말고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즉시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여 처리해주거나 현지 협력업체들과 충분히 소통하여 그들의 협력을 얻어 내는 것이 프로젝트 성공의 열쇠입니다. 현엔의 의무 협력업체로 지정된 토목업체 이네르가와 철골 설치업체 에트르킵은 작업에 방해가 될 것입니다. 그들과의 협력이 이 프로젝트의 성공일 것입니다. 더욱이 저는 회의 참여보다는 현장에서 일했기에, 현장에서 다양한 분야의 현장 코디네이션을 하면 충분한 만족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에트르킵과 이네르가는 계약서상 의무적으로 현대와 일해야 하는 국영 기업체로 삼성 엔지니어링과 한화 건설의 아르쥬 현장에서도 악명 높았다. 일을 위해서 온 업체가 아니라 일을 방해하러 존재하는 업체 같았는데 한국 업체 사람들 모두가 항복 선언을 한 업체였다. 그러나 삼성 엔지니어링만이 계약해지 손해배상을 하고 한국 업체와 계약을 해서 공기를 앞당길 수 있었을 만큼 답이 없는 업체들이었고 그 구성원들이었다. 얘기가 거기까지 미치자 내가 알제리를 알고 있는 것이 확실했고 긍정적인 면접이었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나는 여유롭게 여행을 다니다가 고향 진주에 있을 때 현대로부터 연봉에 동의하며 2차 임원 면접이 진행되니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곧장 거제도로 내려가 로랑을 만나기 위해 약속을 잡았다.




*** 대우조선해양의 비리


삼성중공업에서 건조한 인펙스 CPF(해양가스처리설비) 이치스 프로젝트

 

 오랫동안 기다려 오던 순간이라 알제리를 가는 것이 너무나 기뻤고 조선소 현장에 와서 고생했던 순간들은 말끔하게 잊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벅찬 가슴에 더했다. 기쁜 소식을 로랑에게 전하려 출입증 신청 해놓고 대우조선해양 중공업 정문에 도착했을 때, 내 신분증을 보던 경비원이 의아해 했다.


“언제 퇴사하셨죠?”


“두어 달 되었습니다. 무슨 일 있나요?”


“네, 퇴사처리가 안되었습니다.”


“뭐라고요? 분명 퇴사할 때 출입증 반납했는데요”


경비원이 여기 저기 전화를 했다.


“현장에 들어가서 누구랑 싸우거나 멱살 잡는 거 아니죠?”


 경비원의 질문이 우스웠다. 안전 매니저를 만나러 왔는데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경비원은 내가 퇴사처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들어가도 된다고 말했지만 현장으로 찾아가 부흥 테크니컬 협력 업체에 가서 말썽 피울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기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왜 호들갑을 피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문을 통과해 지원센터로 가는 길에 어린 팀장의 전화를 받았다.


“젊은 놈이 먹고 살려다 보니 실수 좀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건 그렇고 대우에 다시 오실 거면 미리 연락을 좀 주시지 이렇게 갑자기 오시니……”


 나는 젊은 팀장이 하는 말을 그때까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그제서야 팀장이 내 퇴사를 처리하지 않고 출근하는 것처럼 조장해 급여를 타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면서 나의 퇴사 과정을 다 알고 있는 팀장과 주변 사람들이 그 돈으로 착복을 했다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나는 로랑을 만나 그러한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더불어, 현장에 들어가기 위해 배관을 한 번도 해본적이 없는데도 시험을 거쳐야 했던 것과 시험지와 실습 내용도 모두 유출되었던 것도 말했다. 배관사로 등록을 했기 때문이었다. 시험지를 미리 받아보고 필기테스트를 보고 다시 실기 테스트를 보았다. 둘 다 떨어졌는데도 합격 되어 들어갔던 현장이었다. 협력업체들은 팀장들이 빼 먹은 그 돈으로 배를 불렸고 대우조선의 담당자들에게 갖다 바쳤다. 문제가 생기면 팀장의 비리로 자르면 그만이었다.


 그 돈들은 물론, 선주사가 낼 돈이었고 주인없는 대우의 프로젝트 비용을 갉아먹었다. 남상태와 고재호 사장의 물량 몰아주기와 정경유착의 비리는 유명했다. 정권에서 박아 놓은 낙하산들이 하는 일 없이 년 1억을 받아가는 곳이었다. 그들의 시대에 해먹지 않는 자가 바보였을 정도였지만 언론엔 가십적인 한 직원의 공금 횡령과 여자친구와 해외여행을 떠난 일로 떠들썩 했다. 숲을 보지 않고 썩은 나무 몇 그루에 가십거리만 다루는 언론의 태도도 한심했다.


 정직과 신뢰가 무너진 사회나 회사는 정상적일 수가 없으니 그것만이 정상적인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기본 요소라고 믿었다. 나는 프랑스에서 북아프리카 사람들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들의 언행이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프랑스 사회는 최소 70% 이상이 건강하고 정의로운 사회라고 믿었다. 프랑스의 혐오는 관공서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전체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가치인 정직과 신뢰도는 한국보다 훨씬 높다고 믿고 있었다.


 사람에 대한 가치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귀한 것을 알고 가치가 높기 때문에 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기만하는 일은 북아프리카 애들을 만날 때나 관공서의 공무원을 만날 때 외에는 거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쉽게 이웃사람과 어떤 소재로든 대화가 가능했으며 카페에서 사람들과의 유대 관계를 쉽게 만들 수 있었다.


 인간관계에서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존중과 배려가 70% 이상은 된다고 생각했지만 한국에서는 사람과 말을 거는 것도 힘들었고 농담 한마디 하려 해도 눈치를 주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려면 온 몸을 스캔 당하는 기분 나쁜 반응은 물론, 위 아래로 훑는 동안 판단을 다 하는 모양인지 거의 기분 나쁜 결과를 초래했다.


 그런 이유들로 프랑스 사회와 한국 사회를 비교한 개인의 브리핑을 로랑은 들었고 나는 말했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점심 시간 이후에 쉴 공간이 없어 햇빛에 노출되어 자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셸터를 지어서 휴식 공간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요청했다. 휴식 시간도 오전에 10분, 오후에 10분은 OECD 회원국으로써 한국 노동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선주사의 직권으로 30분으로 늘여야 한다고 요청했다. 그리고 이렇게 물량 팀들이 제일 앞장서서 돈을 훔쳐가는 것이 프로젝트 비용을 훔쳐 가는 것이기도 하니 발본색원해서 퇴출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로랑은 그 모든 것이 대우조선해양에서 해야 할 일이지만 하지 않고 있으니 직무유기라는 말에 동의했다. 계약서상 자신들은 공정 이외에 아무것도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휴식 시간에 대해서는, 휴식 시간이 되기도 전에 사람들이 움직여서 하선을 하기 때문에 30분 주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것은 일찍 움직이는 이유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몽 깨피땐, 사람들이 하선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5분에서 10분씩 걸립니다. 그러면 내려와서 곧장 올라가는 것을 휴식 시간이라고 할 수 없으니 내려와서 담배 한대 딱 필 시간만 주는 것도 인권에도 맞지 않고 작업환경에도 맞지 않습니다. 현장에 흡연장을 설치하면 몰라도!

 더욱이 휴식 시간에 담배만 피울 수 없으니 음료를 마실 수 있는 시설, 휴게 시설도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한국인들이 물량팀장처럼 선주사의 프로젝트 비용을 그런 식으로 착복한다는 사실에 너무 실망했습니다. 그런 비리들이 더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로랑이 내 의견에 동의했다. 대우에 요청해서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현대엔지니어링 합격에 이어 기쁜 일들이 겹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생각은 고리타분했고 투박한 언행과 거침 없이 용기 있는 그들을 존중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삶을 내게 요구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들의 억눌리고 짓밟힌 삶이 자유롭고 막힘 없던 내 삶을 통제, 조종한다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것은 존중을 넘어선 의식의 노예화일 뿐, 무한의 가능성을 지닌 나에게 할 수 있는 요구가 아니었다. 그랬던 이유로 조선소 사람들을 거의 사귀지 않았다. 사귀기가 무섭다는 표현이 맞았고 오히려 의식적으로 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특별하게 조심해야 할 부류들이 셋 있었다. 그 셋을 모두 갖춘 사람은 본능적으로 멀어졌다.


 첫 째, 나는 고향 친구들이나 고등학교 친구들도 만날 수 없었다. 처해 있는 형편도 형편이려니와 정치적인 이유가 가장 컸다. 도저히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조선일보의 영향을 받은 친구들과 일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내가 왕따를 당한 것이었다.

두 번째, 기독교도들을 만나는 것은 조선일보 중독자들을 만나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 나는 기독교도들이 무서웠다.

세 번째, 경상도의 정치색이 조선일보와 기독교가 장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제외된 대상이 없었다. 일반적인 대화를 하다가도 자리가 깨지기 일쑤였다.


대우조선해양이 여명에서 깨어나고 있다.



 거기에 더해, 현장 노동자로 오랫동안 산 친구들은 돈을 더 받기 위해 다른 현장으로 가는 것 외에 의리와 신뢰로써 일하는 사람들은 별로 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의 의식은 오로지 현장에서의 일이 사회에서도 이어져 계급화되었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원수 대하듯 했다.


 그러나 새로운 사람에게 그 모든 것을 바랄 수는 없으니 사람을 사귀지는 않되 기본적인 존중과 배려의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거제도는 마음이 가지 않았다. 사막처럼 삭막했다(사막처럼 삭막하다는 의미를 아는가?). 어쩌면 협력회사든 어디든 계약을 하고 들어가 일하면 의식이 좀 달라질까 궁금했지만 한국에서 계약하고 일할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어차피 적응도 못할 거였다.


 명예와 신뢰를 잃은 한국에서 나는 표류했다.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국 사회는 계급이 지배하는 눈에 보이는 착취와 인권유린이 만연했기 때문에, 살아남아 의기양양한 사람들도 을이면서 갑질을 했고 자신은 정의롭다 믿었다. 아부와 아첨, 생존기술로 터득한 처세술이 통했다. 정의(正義)는 을들의 의식주를 위한 먹고사니즘에 가렸다. 분노와 증오 속에 인내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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