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한 일을 마주보는 것은, 우리 어른들도 쉽지 않은 일이란다.
지나는 길에 누군가의 어깨와 부딪혔을 때,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늦게 정해진 장소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미안하단 말에 거리낌이 없다. 그러나 정작 그것이 가장 필요하고
빛을 발하는 화해의 자리에서는, 혀끝에 무거운 추가 달린 듯
소중한 그 한 마디가 자기기만과 아집에 짓눌려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만다.
#1. 꾸지람 들을 때, 더 굳어가는 얼굴
딸 아이는 요즘 사소한 일에 고집을 부리거나
일부러 엄마를 자극하는 언행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아주 어릴 때부터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 것을 육아의 최우선과제로
생각했던 터라, 아이가 그럴 때마다 이성의 끈을 잡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이를 훈육하다보면 자연스레 언성이 높아지며 화법은 빨라졌고,
엄마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얼굴색은 창백해졌다.
엄마는 화날 때 말을 엄청 잘해. 그리고 계속해(투덜).
엄마가 던지는 말폭탄을 가만히 맞고 있으면 아무 생각이 안들어.
내가 잘못한 거? 당연히 생각 안나지. 화난 엄마 얼굴밖에 안보이는데..
흠, 정말 그렇겠구나. 엄마도 그 순간에는 엄마의 생각과 감정에 집중하느라
지율이가 움츠러드는 걸 몰랐네. 미안해.. 지율이가 무언가 잘못했을 때
즉시 그걸 알려주고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엄마가 지나치게
몰아세우고 강요했던 것 같아. 어떤 면에서는 그게 지율이한테 위협적으로
느껴졌을 수 있겠다. 다음부터는 지율이가 스스로 고민하고 늬우칠 시간을 먼저
주도록 노력할께.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화날 때 말을 엄청 잘하는 비결은,
책을 많이 읽는거야(웃음). 그러면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바로바로 떠오르거든.
#2.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화해의 과정
아이 학교 참관수업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입고 갈만한 옷을 찾고 있는데
방에 들어온 아이가, 갑자기 엄마가 학교에 안 왔으면 한다는 것이다.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지만, 친구들이 놀리면 어떻게 하냐는 말에
잠시나마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이에게 가감없이
엄마의 서운한 심정과 불편한 감정을 토로해버렸다. 그렇게 말없이 저녁시간을
보내고 잠자리에 같이 누워있던 아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 모녀는 각자의 자리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화해를 준비했고,
부족한 엄마보다 용감한 우리 딸이 먼저 손을 내밀어준 것이다.
엄마, 미안해. 생각해봤는데.. 엄마는 나한테 하나도 부끄러운 사람이 아니야.
자랑스럽고 고마운 사람이야. 내일 학교에 오면 내가 제일 먼저 뛰어가서
엄마를 안아줄거야. 그러니까 꼭 와. 알았지?
고마워, 우리 딸. 사실 아까 지율이가 엄마한테 학교 오지 말라고,
짧은 머리 남자 같아서 친구들한테 창피하다고 했을 때 엄마 진짜 속상했거든?
그런데 엄마도 다시 생각해보니까, 아홉 살 우리 딸 입장에서는 남과 다른 엄마의
모습이 조금 신경쓰이고 걱정스러울 수 있겠더라. 그래서 엄마는 또 이해했어.
근데 지율아, 어쩌면 우리 딸이 엄마의 아픈 과정을 곁에서 지켜봤기 때문에
남들과 다르다고 느끼는 건 아닐까? 학교 앞이나 놀이터만 가도 엄마처럼 짧은 머리를
한 이모들이 많이 보이던데.. 지율아, 엄마는 지금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이야.
엄마는 우리 딸이, 엄마를 보며 지나치게 많은 생각을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오늘 밤 잘 자고, 내일 아침 잘 일어나는 것에 감사하며 살자, 우리. 굿나잇(쪽)..
#3.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어려운, 그 말
아이가 입학하고 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는
매일밤 숙제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숙제 다했니, 숙제 몇가지 남았니,
내일 수업인 거 알고 있지.. 허공에서 증발하는 잔소리를 거의 매일 하고 있으니,
끌고가는 엄마도 끌려가는 아이도 모두 함께 지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이 되어, 상처를 주는 말에도 정당한 사과없이
스스로 치유되기를 기대하는 일이 잦아짐을 느꼈다. 가족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나한테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엄마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는거야?
순서대로 잘 하고 있는데, 엄마가 갑자기 숙제 밀렸다고 화낸 거잖아.
나는 엄마 때문에 속상했고, 가만히 있어도 자꾸만 생각나서 눈물이 난다구(울컥)..!
아.. 미안해, 지율아. 엄마가 우리 딸한테 사과하는 걸 잊었네.
엄마는 지율이가 숙제는 미루고 효준이랑 장난치며 노는 것 같아서,
으름장을 조금 놓으려고 그런건데.. 지율이가 혼자서 잘하고 있는지 몰랐어.
그렇게 숙제를 하고 있으니 됐다, 하고 안심하고선 우리 딸이 괜한 꾸지람에
상처받았으리라 생각 못했네.. 엄마가 오해한거니 당연히 사과부터 해야했는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서 정말 미안해. 이제부터 엄마도 미안하단 말에
인색하지 않도록 더 노력할테니까, 지율이도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그때그때 솔직하게
얘기해주면 고마울 것 같아. 다시 한번 미안해, 우리 딸.
최근, 다섯 살 아들이 가장 잘하는 말은 '사랑해' 다음으로 '미안해'이다.
"엄마, 장난감 던져서 미안해."
"아빠, 울어서 미안해."
"누나, 때려서 미안해."
크고 작은 일에 사과하는 법에, 우리 아들은 주저함이 없다.
때로는 그 말의 무게와 의미를 알고 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울만큼(웃음),
다섯 살 아이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를 끌어안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그런데, 그보다 몇살 많은 우리 딸은 그것이 어렵고
그보다 몇십년을 더 산 우리 부부는 그것이 어렵다못해 잊어버린지 오래다.
누구나 잘못할 수 있고 실수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그것을 인정하고 사과할 수는 없다.
우리는 때로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
가리고 숨기지 않은 날것의 아이를 배울 필요가 있다.
자신을 속이지 않고, 상대를 가리지 않는 반성의 시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