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살 때는 몰랐던 아홉살만의 즐거움

약간의 무관심과 더많은 인내심이 필요한,, 엄마는 슬기로운 생활 중

by 선물같은 오늘

아홉살 딸아이를 관찰하고 공감하는, 브런치를 연재하며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글감은.. 단언컨대 이번 회차의 "즐거움"이었다.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과제에 치이고,

어린 동생의 투정과 일상에 지친 부모의 짜증까지 받아내는

아홉살 우리 딸의 즐거움이.. 너무나 당연하게도 너무나 메말라 있었기 때문이다.

수시로 걸려오는 아이의 전화가 회의와 맞물리면 단답으로 끊기 바쁘고,

해질녁 늦은 오후에 달려오는 아이의 포옹을 무심히 밀어내고..

밤늦게 잠자리에 누워 이야기보따리를 풀려는 아이의 입을 닫게 하는,

마흔다섯 워킹맘이 감히 아이의 즐거움에 대해 논할 자격은 있을까?

근본적인 회의와 속절없는 자책에, 쓰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겨우 매듭을 지었다.



#1. 태블릿 PC와 핸드폰이 만들어내는 아홉살 대환장파티


미디어 노출은 가능한 짧고 굵게, 라는 방침(?) 아래

우리 딸은 평일 아침, 저녁 2~30분 가량 태블릿 PC로

유튜브를 보거나 로블럭스를 하곤 했다. 그러다 최근 주중에는

미디어를 끊고, 주말에 몰아서 누리겠다며 내게 협상(?)을 제안해왔다.

그렇게, 주말 이틀 각각 3시간을 합의하고 첫번째 주말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집안을 울리는 여자아이들의 목소리에 잠이 깬 나는,

친구와 스피커폰으로 통화하는 동시에 태블릿 PC로 게임까지 하는

우리 딸의 멀티태스킹 현장을 발견했다. 하아.. 사전에 합의한 사항이긴 하지만

막상 눈과 귀로 마주한 딸아이의 주말 일탈(?)을 보고 있자니, 울컥 하고 올라오는

가슴 속 뜨거운 분노와 회의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화를 낼 수는 없다.

그저 딸아이가 게임을 마친 후, 스스로 책 몇권이라도 읽어주기를 조용히 기도할 뿐이다.

목청이 담장을 넘고 목젖이 보일 정도로 웃어제끼는 딸아이의 즐거운 모습을 보는

것은, 최근 들어 엄마의 갱년기와 맞물려 아주 어려운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깔깔깔~, 그래, 가현아! 그거 먹어야돼~, 잘했어!!
서현아! 나랑 같이 가야지~, 혼자 가면 어떡해~~, 아유,,
(엄마둥절)에휴,, (이어지는 깊은 한숨 ㅎ)



#2. 이제는 초콜릿 과자보다 파스텔 립밤에 더 행복한 아홉살 그녀


요즘 우리 딸에게는 새로운 참새 방앗간이 생겼다.

얼마 전만 해도 마트만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과자며 초콜릿을

구경하던 딸아이가 문구점에 이어 올리브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면 은은하게 코끝을 자극하는 향수냄새와

핸드크림부터 헤어에센스까지 새하얀 조명 아래 반짝이는 각양각색의 화장품.

한동안은 유튜버 언니들의 다이소 잇템을 시청하던 아이가

어느새 자라, 파우더 퍼프를 볼에 두드리고 립밤을 입에 그리며 행복해한다.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한편으로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아이가 너무 빨리 자라 손에 닿지 않는 곳까지 클까 싶은.. 여린 조바심일 것이다.


엄마, 나 립밤 하나 더 사주면 안돼?
이거 색깔이 너무 예쁘다, 냄새도 정말 좋아!
그게 그렇게 마음에 들어? 좋아, 오늘은 지율이가 단원평가도 백점 받았으니
엄마가 하나 쏜다! 대신, 아무데나 굴리지 말고 잘 보관해서 사용하기.
그리고 중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립밤 외 다른 화장품에
과하게 관심갖지 않기로 약속해~, (우리딸 입술 삐죽 ㅎㅎ;;)



#3. 엄마 아빠와 온전히 마주볼 수 있는, 모두의 마블


평소에는 각자의 일상에 지쳐 말수가 줄어들고,

주말에는 나들이 분위기에 휩쓸려 진솔한 대화가 부족한

우리 가족이, 요즘 유일하게 마주보는 시간은 보드게임을 할 때다.

각자 좋아하는 음료와 간식을 쌓아두고, 식탁에 둘러앉아

주사위를 굴리고 건물을 지으며 오롯이 서로에게 집중하는 시간..

아빠한테 쓰디쓴 패배를 맛보고, 엄마에게서 달디단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우리 딸의 마블 실력은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더불어, 우리 가족의

소박하고 소중한 추억도 꾸준히 쌓여가는 중이다.


흥, 아빠는 땅도 많고 건물도 많고.. 마블도 나보다 더 많이 해봤으면서
하나도 안봐줘. 어린이를 상대로 저렇게 열심히 해도 되는거야?!!
하하.. 지율아, 정말 아빠가 너한테 져주기를 바라는거야?
그럼 마블이 너무나 시시해질텐데.. 당분간은 엄마한테 이기면서
경험을 쌓아가는 게 어때? 그래야 나중에 친구들이랑 게임할 때,
제대로 된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지 않겠어? 아빠도 오랜 연습으로
지금의 실력을 얻게 된거야. 만약 지율이가 아홉살 아빠와 정정당당하게
대결한다면 단숨에 이겨버릴지도 모르지(웃음). 그런데 지율아
게임이나 경쟁에서 승리만큼이나 중요한 게 있어.
과정 그 자체를 즐기는 것. 무언가 하는 과정이 즐거우면
이기지 못하는 싸움은 없거든. 함께하는 사람과 행복하고 노력하는 시간이
즐거우면, 결과는 그저 따라오는거야. 물론 지율이가 기대했던 결과로, 말이지.
엄마는 우리 딸이 결과보다는, 과정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어.



아홉살 딸아이의 즐거움이 좀더 다양해지기를,

더욱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욕심을 비우고

진심을 채우기로 다짐한다. 그렇게 아이와 함께 자주 웃고 더 시끄럽게

떠들기로 마음먹는다. 지금 이 순간 우리 딸이 전하는 귀여운 목소리를 기억하고,

명랑하고 기발한 어휘력에 감탄할 수 있도록.. 내안의 오감을 더 많이 깨우기로 결심한다.

그러므로 딸아이에 대한 미안함은 잠시 여기 내려두고,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보다 정성껏 준비하며 나부터 행복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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