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지나고 이 주만에 다시 찾은 처갓집.
정월 대보름 밥상에는 장록나물, 오가피 새순 나물, 호박 고지, 겉절이 배추 김치, 나박 김치, 김과 함께 잡곡밥이 올라 있었다. 봄에 나는 나물로 겨울 밥상을 차린 데에는 봄부터 누적된 정성이 담겨 있었다.
장록 나물은 자기 색 잃은 옅은 녹색, 오가피 새순은 지금 막 가지를 뚫고 나온 초록 그대로임은 둘의 준비 과정이 달랐음을 말해 주었다. 자리공으로도 불리는 장록은 독성이 있어 뿌리가 사약의 재료로 쓰였던 만큼 어린 잎만 식용으로 사용한다. 땅에서 올라온 새순을 꺾어 오래 삶으면서 독성을 한 차례 제거하고 삶은 후에도 물을 갈아 주며 하루 이틀 두어 남은 독이 우러나게 한다. 독이 빠진 나물은 물기를 꼭 짜서 햇볕에 말린다. 그렇게 보관해 해가 바뀌고 새로운 장록이 땅을 뚫고 나오기 직전 입춘도 지난 정월 대보름날 무침으로 바뀌어 상에 오른다. 독을 제거하고자 오래 삶고 불린 탓에 조리할 때는 다시 삶지 않고 물에 불리기만 한다. 채취-삶기-물에 우려 내기-말리기-불리기-볶기의 과정으로 상에 오른 장록은 한 젓가락 집을 때 마다 한번 더 쳐다 보게 되고 씹을 때 다시 한번 향을 음미하며 준비한 사람의 정성에 답하게 한다.
자기색을 잃은 장록 옆에, 방금 짜낸 초록 물감처럼 반짝이는 색으로 산으로 다시 갈 것처럼 통통한 줄기를 가진 오가피 새순 나물이 있다. 오가피 새순 나물은 장록과는 준비과정이 사뭇 다르다. 장록이 풀이라면 오가피는 나무다. 장록은 삶고 불림에 따라 식용이 결정되지만 오가피 새순은 타이밍이다. 오가피 나무는 벚꽃 필 무렵 새순을 세상에 내보낸다. 순이 가지가 되는 건 시간 문제. 억세지기 전에 따내야 한다. 가장 여린 순간에 채취한 순은 끓는 물에 데쳐 바로 먹기도 하지만 일부는 내년 보름 밥상에 오르기 위해 냉동실로 들어 간다. 작년 봄의 수고를 간직한 채 열 달만에 상에 오른 오가피 새순 나물은 바로 먹는 그 맛이나 차이가 없다. 감초처럼 달고도 쓴 맛, 생미역 줄기를 씹는 듯한 저항없는 단단함. 알밤 가득 들어간 잡곡밥에 나물 한 젓가락 올려 먹으면 입안은 달고 쓰고 오독한, 맛과 식감의 잔치다. 여기에 나박 김치 국물 한 숟갈로 일순간 입속 상황을 정리하고 다음을 기다린다.
돌아 오는 길에 차 뒤를 비추며 따라오는 달에게 올해 만큼은 '무엇을 해달라' 빌기 보다 지금처럼 내 사는 모습을 지켜봐 달라고만 했다. 내년 이맘 때 나물 밥상 앞에 놓고 지난 일년 이야기할 재료를 열심히 만들어 볼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