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늦은 오후, 하수구가 막혀 싱크대 밑이 물로 흥건하다는 다급한 연락을 받고 장비를 챙겨 남편과 함께 출동했다. 다행히 내가 출근하지 않은 날이었다.
남편이 관통기 체인을 배수구 밑으로 몇 미터 밀어 넣고 당기고 다시 밀어 넣기를 반복하면서 손끝에서 미묘하게 느껴지는 변화를 감지하며 나에게 지시하면 나는 관통기에 연결된 드릴을 조심스레 일정한 강도와 속도를 유지하며 집중해서 작동시킨다. 갑자기 너무 세게 돌리거나 반대로 잘못 작동시키면 배수구 안에서 체인이 엉키거나 걸려서 빼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한다. 그만큼 매우 세밀한 작업이다. 보통 한 시간 정도 작업하면 웬만큼 뚫리는데 이번에는 하수구가 얼마나 지독한 동맥경화에 걸렸는지 남편이 세 시간이 넘도록 싱크대 아래에 수그리고 앉아 뚫고 뚫고 또 뚫어도 물이 시원하게 내려가지 않았다.
아들이 장가를 가면서 두고 간, 순하고 얌전한 ‘춘배’라는 이름의 검은색 시바견의 할머니이자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도자기 수업을 하신다는 의뢰인 아주머니께서는 우리 곁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틈틈이 아들딸과 통화도 하시고 춘배에게 닭가슴살을 데워 간식도 먹이신다.춘배의 밥그릇이 직접 빚으신 도자기 작품이다. 물론 몇 시간째 수고하는 우리에게도 고맙고 미안하다며 연신 간식을 챙겨주신다. 맨바닥이 차갑다며 방석도 깔아주시고, 과일도 깎아 주셨다. 어디 그뿐인가? 사양 벌꿀 스틱도 내미시고, 남편분께만 챙겨주신다는 글루타치온 필름을 어서 입에 넣으라며 금빛으로 빛나는 포장까지 벗겨서 건네신다. 처음 경험해 보는 맛이다. 이런 건강식품도, 이런 친절도. 며느리가 아이를 가졌는데 직접 이야기하면 그마저도 부담스러울까 봐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리 젊고 건강해도 임산부이니 절대 무리하게 두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신다. 일주일 내내 감기를 앓았는데 딸이 음식을 배달시켜 줘서 먹었다며 딸이 최고라고 아들 키워봐야 소용없다며 농담을 건네는 통화에서도 평소의 살가움이 느껴져 참 보기 좋았다. 조만간 산후조리원비도 내줘야 한다며 행복한 푸념을 하시는 모습까지도 넉넉하고도 너른 어른의 품이 느껴져 그분의 자녀분들이 부러운 마음도 들었다.
한참을 더 애쓴 끝에 드디어 꽉 막혔던 하수구가 뚫렸다. 그리고도 남편은 한참을 더 배관 구석구석 스케일링을 마저 해주는 완벽을 기했다. 작업을 마무리하고 마지막으로 싱크대에 물을 가득 받은 후 물 내림을 테스트하는데 거대한 용트림을 하며 시원하게 물이 싹 빠진다. 2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순간이다. 남편이 의뢰인께 작업과정을 설명하고 막히지 않고 오래도록 잘 쓰려면 평소에 기름을 조리한 후 싱크대에 바로 버리지 말고 못 쓰는 화장지나 키친타월로 기름을 닦아내어 쓰레기통에 버린 후 설거지하는 것이 좋다고 꿀팁을 전수하는 동안 나는 주변을 청소하고 흩어진 장비들을 정리했다. 의뢰인께서 정말 수고가 많으셨다고 부부가 함께 다니니 참 보기 좋다며 지금 들어가서 저녁은 못 할 테니 아내분 저녁 사 먹이고 들어가라며 인센티브도 꽤 넉넉히 챙겨주신다. 가면서 마시라며 ABC주스와 함께! 우리는 정말 감사하다고 거듭 인사를 드리고 짐을 챙겨 나왔다. 이런 날도 있구나. - 오전에 다녀온 어느 집에서는 크고 무거운 문짝을 두 개나 떼어내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수리를 해줬는데도 물 한 모금도 못 얻어 마시고 왔다. 심지어 곁에서 자기네들은 냄새를 풍기며 점심까지 먹으면서도 말이다. -
이렇듯 많은 곳을 다니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평소에 오래도록 자연스럽게 몸에 밴 친절이나 다정함이 아니고서는 조금 과하다 싶을 만큼 적극적으로 표현해야만 상대방에게 겨우 가닿는 것이 친절이구나 느낄 때가 있다. 물론 장사하는 사람이 친절과 서비스라는 유니폼을 입어야 하는 것이 사회생활이기도 하지만,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는 짧은 순간일지라도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느껴지고 어느 정도는 알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책 몇 페이지만 읽어도 인물의 성정과 됨됨이가 파악되듯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자주 가게 되는 우리 가게 위층에 있는 새로 오픈한 편의점 알바생이 심히 걱정된다. 그분은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것이겠지만, 우리가 느끼기에는 너무 무뚝뚝하고 불친절하다. 심지어 키오스크나 손님인 우리가 더 친절하다고 여길 지경이다. 친절이란 어쩌면 내가 먼저 나 자신에게 기분 좋게 대함으로써 그것이 배어 나와 저절로 상대방에게 전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2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순간!
가게를 얻고 인터넷 간판을 명확하게 등록하고 나니 블로그 검색을 통해 연락이 오는 경우가 눈에 띄게 늘었다. 이제는 검색하면 맨 위에 바로 뜬다. 돈을 주고 광고하는 티가 나는 블로그들보다 누가 봐도 직접 하는 것 같은 진솔하고 인간적인 느낌이 좋아서 선택했다고 하시는 분도 있고, 처음인데도 불구하고 연락처를 미리 등록해서 카톡으로 선뜻 연락해 오시는 분도 있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짧게라도 가능한 매일 꾸준히 블로그를 쓰는 남편의 정성과 노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나는 이틀은 피고용인으로 직장을 다니고 나머지 닷새는 남편과 함께 자영업자로 여기저기 발로 뛰는 오광쌍피(五廣雙被)의 삶에 적응해나가고 있다. 일이 없는 틈틈이 집에 있던 살림을 들고 나르며 창고이자 가게이자 작업실이 된 우리의 공간도 채워가면서. 가게를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예쁜 접시와 컵도 선물해 주는 든든한 후원인-말 그대로 우리가 가장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 준 진정한 후원인이다-도 있고, 우리 부부를 꾸준히 응원해 주시는 작가님께서 사무실에 꼭 필요한 전기포트도 선물로 보내오셨다. 기능이 엄청 다양해서 달걀도 삶아 먹을 수 있다. 은은한 다정함에 이 추운 날씨에도 마음은 따뜻하기 그지없다. 이토록 소중한 이들의 나눔과 보탬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한 줄기 빛이다. 열심히 잘 살아내서 이 마음의 빚에 보답하는 날이 꼭 오도록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이자 의무이다.
나눔과 보탬으로 삽니다. 고맙습니다.
오늘은 작은 방에 있던 책상과 의자를 옮기기로 했는데 차가 말썽이다. 16년째 여기저기 광활하게 누빈 우리의 싼타가 며칠 전부터 이상한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주인을 닮아 보는 눈이 있나? 내내 버텨오다가 마침 짐을 내려놓을 자리를 얻은 걸 어떻게 알고는 이때다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 너도 고단했지? 오래 버텼다. 고맙다. 일단 오늘은 병원에 가보자, 싼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