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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나무 여운 Apr 20. 2024

여행, 책방, 그림책

책방 답사 1


서점에서 일하면서 생긴 가장 좋은 취미는 책방 답사를 다니는 일이다. 가는 곳마다 그 지역이나 동네의 책방을 찾아다닌다. 처음 가본 낯선 곳이라도 꼭 가보고 싶은 익숙한 공간이 생기는 셈이다.    

 

때늦은 10월의 여름휴가였다. 다른 직원들이 모두 휴가를 다녀온 지 한참 되었고 서점 내부 리모델링 공사가 있어 그것까지 마무리 지어 놓고 보니 한참 늦어졌다. 목적지는 경주로 잡았다. 지친 만큼 멀리 떠나오고 싶었지만 코로나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비행기를 탈 체력도 숙소를 알아볼 여력도 없어 남편과 나는 텐트만 겨우 하나 들고서 경주 어느 바닷가에 진을 쳤다. 경주에 바다가 잇닿아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마침 10월에는 결혼기념일도 있었고, 남편도 나도 학창 시절 수학여행을 다녀온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 여행으로 세 가지 모두 기록을 새로이 할 수 있겠다.   

  

가장 먼저 필수코스로 불국사와 석굴암에 발도장을 찍었다. 첨성대 앞에서 당연히 인증샷도 찍었다. 역시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 이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이 먼 길을 기꺼이 달려와야 하는 것이다. 마음은 수학여행 온 꽃다운 소녀를 하고서. 나도 이제 석굴암 와 본 여자야. 마침 날씨까지도 안성맞춤으로 완벽하다.     


마침내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책방! 휴가 맞나? 벤치마킹도 업무의 연장 아닌가? 나는 워커홀릭이었다. 일을 너무 사랑했다. 책방을 너무 사랑한다. 이곳에서만큼은 눈빛이 빛난다.   

  

경주에 오면 꼭 들러야 한다는 황리단길? 그 한가운데에 책방이 있었다. 이름은 <어서어서>라고 어디에나 있는 서점, 어디에도 없는 서점이라는 뜻이란다. 그런데 그곳은 이미 관광지 핫플레이스가 되어 젊은 친구들로 꽉 차 있었고 주인장은 이미 지쳤는지 조금 무뚝뚝하게 느껴졌다. 책만 사고 어서어서 자리를 비켜줘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작은 책방에서는 책을 반드시 산다'는 나의 철칙대로 그 책방지기가 직접 썼다는 책과 크리스티앙 보뱅의 책 한 권을 사 들고 우리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좀 더 머무르며 음미하지 못해 아쉬웠다. 그래도 책방에 손님이 많다는 건 참 다행인 일이다. 사진만 찍고 가지 마시고 책을 부디 꼭 사세요. 그 책방의 시그니처는 책을 담아주는 봉투였다. 읽는 약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 책이 약이지. 책방이 약방이지.


<어서어서> 서점 / 평대 위에 책을 이렇게 꽂는 방법도 괜찮네





날이 이렇게나 좋은데 이게 다야? 못내 아쉬웠는지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대릉원 벤치에 앉아 잠시 바람을 즐겼다. 그리고는 터덜터덜 발길이 이끄는 대로 거리를 배회했다. 이렇게 특별한 목적 없이 하염없이 거니는 것도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여유였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나도 이렇게 그리고 싶다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나의 참새방앗간! 취향저격인 기념품샵에 들러 누가 봐도 나를 닮은 그림엽서와 뱃지, 그리고 경주를 담은 마스킹테이프를 사 들고 하던 배회를 마저 이어갔다. 그렇게 어느 은 골목을 지나다가 작은 마당이 있는 너무나 예쁜, 작고 하얀 집을 발견했다. 그 앞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문지기를 하고 있었다. 너무 예쁜 나머지 나도 모르게 그만 마법처럼 끌려서 그곳이 뭐 하는 곳인지 살필 겨를도 없이 그냥 무작정 들어섰다. 놀랍게도 그곳은 바로 그림책만을 전문으로 하는 그림책방이었다.


그림책방 <소소밀밀> 말 그대로 그림 같다. 저 고양이는 인형이 아닙니다. / 하선정 그림책 <스트로 베리 베리 팡팡>


공간에는 무릇 그 공간지기의 철학이 담기고 기운이 어리는 법이다. 그래서 끌렸을 것이다. <소소밀밀>이라는 어여쁜 이름의 그 마법 같은 공간의 주인장 부부께서는 직접 그림을 그리는 작가분들이라고 하셨다. 마침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시간이 슬로 모션으로 흐르는 것만 같다. 나는 아주 천천히 느긋하게 책을 둘러보았다. 그래, 이 맛이야. 책방은 이 맛이지.    

 

그림책으로만 가득 찬 그 공간에서 내가 발견한 작품은 미야자와 겐지의 <비에도 지지 않고>라는 책이었다. 그 자리에 서서 다 읽었다. 그 작가가 누구인지도 그때는 몰랐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그냥 이끌려 눈에 띄었다. 나는 그냥 보는 눈이 있는 거였다. 그 책을 샀느냐고? 아니. 아껴두고 아직 소장하지는 못하고 있다. 대신 그곳을 지키고 있던 앳되고 어여쁜 작가님의 그림책을 샀다. 그분도 그림책 작가라고 했다. 주인장 부부는 다른 곳에 더 크게 북카페를 열어서 운영하고 있고, 자신이 파트타임으로 원류인 이 공간을 지키고 있다고. 그 짧은 순간 이야기까지 나누었는데 그렇다면 이 분의 책을 사야지. 이미 넘치는 호수나 바다에 한 방울 보태기보다는 이왕이면 숲 속의 작은 옹달샘에 한 방울 보태는 것이 훨씬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물론 주인장분들이 그리신 그림엽서도 여러 장 함께 샀다.


충분히 즐긴 후 책방을 나서며 나는 생각했다. 이런 공간에서 미야자와 겐지의 문장처럼 살고 싶다고. 나도 저 창가에 앉아 쓰고 그리고 싶다고. 그러면 족할 것 같다고. 여행을 떠나와서 만난 책방과 그림책은 오롯이 내 마음에 아로새겨졌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이분이 바로 그 유명한 <은하철도 999>의 원작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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