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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나무 여운 Apr 23. 2024

요람에서 무덤까지

세상의 모든 책 세상의 모든 사람

하루는 젊은 여성 손님이 문제집을 사러 왔다. 학원 강사라고 했다. 주문한 문제집과 함께 미리 요청했던 교사용 교재를 찾아 챙겨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 고등학교 때도 여기 서점에 다녔어요."


고등학교 때 문제집을 사서 풀던 학생이 어느덧 대학까지 졸업하고 지금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원 강사가 되어 문제집을 사러 온 것이다. 그 사이 결혼도 했다고 한다. 우와! 그야말로 서점과 함께 해 온 역사의 산 증인이다.


그렇다면 서점에 찾아오는 가장 어린 손님은? 아장아장 걷는 손님? 유모차에 타고 오는 손님? 땡! 엄마 뱃속에서부터 함께 찾아오는 손님이다. 아기는 엄마가 조곤조곤 책 읽어주는 소리를 들으며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 개가 자라고 엄마를 만나 함께 손잡고 서점에 찾아올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서점에서 가장 오래된 손님은? 이건 후보들이 워낙 많고 쟁쟁해서 순위를 가리기가 어려울 것 같다.


책은 집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 꼭 필요하다. 그런데 서점에서 일을 하다 보니 집과 책이 다른 점 한 가지를 발견했다. 집은 높을수록 대우를 받는데 책은 아니다. 책은 벽서가나 입서가 멀리 높은 자리에 세워 꽂히는 것보다 가까이 낮은 곳에 뉘어 놓이는 것이  몸값이 비싸고 독자는 물론 작가도 출판사도 기쁘게 한다. 그리고 그 기쁨이 지속되려면 책을 사야 한다. 책이 팔려야 작가도 출판사도 물론 서점도 먹고살 수 있다. 내 월급이 거기서 나오는 것은 두 말하면 입 아프고. 그 월급 그대로 고스란히 가져다 서점에서 책을 가장 많이 산 건 안 비밀이다.


일을 하다 보면 저렇게나 책이 많은데도 그 안에 손님들이 찾는 책이 없을 때가 많다는 것도 매번 신기하고 놀랍다. 지극히 현실적으로 보면 서점 입구에 들어섰을 때 우리 시선 안에 바로 들어오고 가장 중앙 가까이에 놓인 베스트 도서들을 제외하고는 그냥 그때그때 주문받아서 입고되는 것도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물류와 배송의 왕국답게 전문서적 등을 제외하고는 정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주문 다음 날 입고된다. 사실 우리들도 어쩔 수 없이 이미 마케팅되어 가까이 자주 노출되는 익숙한 유명 작가들의 책이나 베스트 도서 위주로 보게 된다. 벽에 이미 박제되다시피 한 책들이 훨씬 많다. 이게 현실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오프라인 서점이 사라진다면? 그냥 인터넷으로 기능과 필요에 의한 책만 주문하고 서점도 팔리는 책만 들여놓는다면? 그보다 삭막한 종이의 숲이 있을까? 이 숲이든 저 숲이든 숲이 사라지는 건 슬픈 일이다. 울창한 종이의 숲에서 길도 잃고 배회도 하고 그러다 좀 앉아서 머무르다 쉬기도 하고 또 그러다 길도 찾고 꿈도 줍고. 이파리 하나 주워다 책장 사이에 끼워놓고. (그 이파리가 내 이파리이면 영광이고.) 이 얼마나 좋은가? 사람이 살면서 한 번쯤 길도 잃어보고 해야지. 그렇다면 책의 숲에서 길을 잃는 것만큼 안전하게 미아가 되는 법이 또 있을까? 그래서 물론 도서관도 더 많아져야 한다. 사실은 도서관이 서점에서 책을 가장 많이 사주는 우리의 큰손이다.


나는 어릴 적 마을문고 키즈였다. 30년도 훨씬 전에 시골에서는 서점은커녕 학교가 전부였고 책 자체도 귀했을 것이다. 게다가 부모가 나를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어주는 그런 판타스틱한 사랑은 받아본 기억도 없다. 그러나 어쨌든 마을문고가 있었다. 늘 동무들과 그곳에서 책을 읽고 어울려 놀았다. 서로의 꿈도 나누었다. 그곳이 우리의 아지트였다. 물론 그때 무슨 책을 읽었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문고는 콩나물시루였고 나는 콩이었고 책은 물이었다. 물이 밑으로 다 빠져버리는 것 같아도 콩은 무럭무럭 자란다. 이렇게 자랐다.


세상이 모두 얼어붙는 빙하기의 위력을 보여주는 재난영화 <투모로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그들의 피난처가 하필 도서관이었다는 점이다.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를 위기의 마지막까지 도서관이라 이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물론 태울 종이가 많아서도 버티고 살아남기도 했지만.)


서점이든 도서관이든 우리가 책만 만나러 오지는 않을 것이다. 책을 만나고 책과 함께하는 사람을 만나고, 책을 통해 과거의 이야기와 미래의 꿈을 만나고 전통과 전설을 경험하고, 서로 연결되어 간다운 화를 함께 누리고 성장해 가면서 우리 자신이 그 문화와 역사의 한 부분이 되고 싶은 것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세상의 모든 책과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함께하는 종이의 숲이 바로 내가 사랑하는 곳이다.


책과 책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책과 사람 사이에

그 한가운데에 나는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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