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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나무 여운 Apr 26. 2024

이만하면 덕후라고 할만하지

시종일관 <빨강 머리 앤>

나를 키운 건 8할이 빨강 머리 앤이다.


이 첫 줄에 공감한다면 그대도 나의 벗이다. 친구가 말한다. 덕질은 같이 해야 재미있는 거야.


책은 물론이고 다이어리, 노트, 필통, 머그컵, 스티커, 마스킹테이프에 심지어 이모티콘까지 있다. 우리집 냉장고와 현관문에는 빨강머리 앤이 덕지덕지 붙어서 언제나 눈맞춤을 하고 있다. 휴대폰 케이스도 사고, 상처난 곳에 붙이는 밴드도 새로 들어왔는데 살 뻔했다. 살 걸. 괜히 참았네. 지인에게 빨강 머리 앤 편지지에 감사 편지를 썼다가 빨강 머리 앤 원단으로 만든 파우치까지 선물 받았다. 넷플릭스 드라마도 정주행 당연히 했지. 이만하면 덕후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아니다. 전집이라도 소장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다. TV에서 그린 게이블을 닮은 집을 지어서 예쁜 드레스까지 입고 실제로 살고 있는 가족들이 나오네. 내가 졌다.


그러나 중요한 건 무얼 가졌느냐가 아니다. 어떻게 사느냐이지! 어릴 적 빨강머리 앤과 함께 자란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속에 숨겨둔 마음은 그대로 있다. 그 마음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지키며 살고 싶다. 우리 안에 그대로 다 있지 않나, 그때 그 소녀? 가장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가장 오랜 시간 변함없이 한결같이 <빨강머리 앤>을 사랑했다는 사실이다. 빨강머리 앤만 보면 여전히 나를 떠올린다는 친구들은 안다. 그러고 보면 참 신기하고 고마운 일이다. 친구들은 어떻게 다 알지? 그런데 나는 과연 친구들이 나를 알고 있는 만큼 친구들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 문득 반성문을 써야만 할 것 같다.



오며 가며 자세히 지켜본 바로는 정도의 차이는 조금 있을지 몰라도 남녀노소 누구나 빨강머리 앤을 좋아하는 건 맞는 것 같다. 싫어하는 사람 아직 못 봤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만큼만 보여서 그럴까? 빨강머리 앤의 진정한 힘은 세대를 뛰어넘는다는 데에 있다. 아직 한참 어려 보이는 소녀 손님 한 분이 엄마 손을 꼭 잡고 찾아왔다. 내가 하루에 한 번은 꼭 들러보는 <빨강 머리 앤> 서가를 지나다가 마침내 소녀는 그 책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앤을 만나고 말았다. 사달라고 조른다. 엄마의 대답은?


"안 돼. 집에 있단 말이야."


당신도 앤의 친구이시군요? 엄마와 소녀는 한참을 주변 서가를 멤돌다가 앤에게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결국 소녀는 앤의 손을 잡고 떠났다. 그 엄마분도 나처럼 앤에게는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제가 직접 골라서 앞에 꺼내 세워놓은 바로 그 표지의 <빨강 머리 앤>을 제가 또 채워 넣었거든요. 후훗-.


 매튜 아저씨가 말한다.


"너의 낭만을 잃지 말거라, 앤."



p.s. 여보, 우리 이다음에 20주년 결혼기념일에는 캐나다에 있는 프린스에드워드 섬으로 여행 가는 건 어때요? 많이 벌어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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