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조금 한가한 평일 오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베르나르의 엄청난 팬이시구나 첫마디에서 느껴졌다. 저는 <타나토노트>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리고 전화 목소리에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알아챌 수 있었다. 아마도 그 손님은 뇌성마비 장애가 있으신 듯했다. 그분의 말을 좀 더 명확하게 잘 알아들으려면 집중력도 조금 더 필요했다. 그러나 발음 이외에는 의사소통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나는 한쪽 귀에 수화기를 댄 채로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씀드린 후 빛의 속도로 알라딘 홈페이지에서 베르나르의 책을 최신순으로 검색했다. 그와 동시에서점의 입출고를 한 번 더 확인한 후 <제3인류>와 <신>이 인기가 많다고 알려드렸다. <개미>는 이미 읽으셨겠지? 베르나르는 이름 있는 작가답게 외국소설 서가에 자신만의 자리를 명확하게 차지하고 있었고 최근 책도 베스트 서가 위에 수시로 채워지고 있었다.
"이번 주말에 들를게요."
통화를 마친 후 나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멈춰 있었다. 처음이었다. 그 전화를 받기 전까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장애가 있으신 분도 어쩌면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서점에 오고 싶은 마음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고 당연한 건데. 본 적도 없고 떠올린 적도 없었다니 이토록 단편적인 나 자신에게 새삼 놀랍도록 실망스러웠다.
나는 얼른 다시 정신을 차린 후 그분이 우리 서점까지 찾아 올 동선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다행히 주차장에서 서점까지는 엘리베이터로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솔직히 보통의 우리들 같으면 그냥 오고 싶을 때 아무 때나 들르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굳이 전화로 한 번 묻고 주말에 들르겠다고 미리 알려주신 건 오히려 우리들에 대한 그분의 배려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나저나 주말에 나는 근무를 안 하는데 어떡하지? 일단 다른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미리 알려 두었다. 베르나르 팬이시라고 하니 아주 가끔 오시는 손님이라고 알고 있는 직원이 있었다.
그 손님은 무사히 잘 다녀 가셨을까? 서가 여기저기 충분히 누비시며 책을 즐기다 가셨을까?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그 전화를 받은 후 나는 늘 보아오던 서가가 이전과는 달리 보였다. 가장 우려되는 건 통로의 폭과 서가의 높이였다. 휠체어가 지나다니기에 통로는 넉넉한가? 벽서가는 역시나 너무나 높구나. 휠체어에 앉은 채로는 평대 위도 겨우 보일만큼 그렇게 낮은 높이는 아니었다. 도서를 검색할 수 있는 컴퓨터 역시 선 자세로만 가능해서 그날따라 유난히 높아 보였다. 그분 덕분에 비로소 나는 나의 부족한 시선과 눈높이를 겨우 한 뼘 더 확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 서로에게 모두.
그 후에도 휠체어를 타신 여성 손님을 뵌 적이 있다. 그분은 주로 베스트 평대와 예술 디자인 서가를 중심으로 둘러보고 계셨다. 나는 책을 꽂고 정리하는 듯 자연스럽게 그분 곁으로 다가가 혹시 특별히 찾으시는 책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해 달라고 가볍게 넌지시 한 마디를 건넸다. 돕고 싶은 마음이 넘친다고 무작정 다가가서 돕는 게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 또한 일방적인 무례함이 될 수도 있다. 먼저 도움이 필요한지를 묻고, 도움을 요청해 오는 경우에만 다가가서 돕는 것이 배려라고 했다. 보자기처럼 펄럭이는 나의 이 오지랖을 단속하기가 이토록 힘들다.
그분께서는 내게 혹시 민화와 관련된 책이 있으면 좀 찾아줄 수 있느냐고 부탁하셨다. 아, 그림을 그리시나 보다. 그래서 예술 디자인 서가 주변을 서성거리셨구나. 그런데 나는 그분의 부탁이 왜 기쁘지?우선 그분께 테이블 한쪽에 자리를 잡으실 수 있도록 안내해 드린 후 몇 권을 찾아서 가져다 드렸다. 최근에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민화를 많이 배운다고는 하는데 아무래도 민화와 관련된 책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휠체어를 타든 안 타든 우리는 모두 동등하게 서점에 들러 여기저기 서가를 누비며 좋아하는 작가를 만나고 좋은 책을 발견하는 재미를 충분히 맛보고 싶다. 서점에 다니고픈 그 마음은 같아도 그 문턱의 높이까지 모두에게 같지는 않다는 현실을 그만큼 보기 드물고 만나기 어려운 그 손님들을 통해서 또 배웠다.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결코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서점에서 볼 수 있는 손님들 중에는 휠체어보다는 유모차와 킥보드를 끌고 오는 손님, 그리고 심지어 카트에 강아지를 태운 손님이 더 많았다. 킥보드는 안전을 위해 서점 입구에 주차해 주세요, 어린이 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