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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나무 여운 Apr 21. 2024

서가에도 프라이드가 있지!

내 역할에도 자긍심이 있고


은행은 셔터를 내린 후에 더 바쁘고 도서관은 휴관일에 더 바쁘다고 한다. 그래도 이들은 쉬는 날이라도 있다. 서점은 명절을 제외하고 360일 내내 고요하게 바쁘다. 매일 영업시간도 길고 주말에는 더 붐빈다. 명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문 닫는 날도 없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월화수목금 내내 정말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입고 업무만 해도 허덕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 입고를 받아내고 감당하려면 그만큼 자리를 만들어야 하고 그러려면 그만큼 비워내고 주기적으로 서가를 정비하고 순환시켜야만 한다. 책이 골고루 많이 팔려서 저절로 순환된다면야 기쁘겠지만.   


우리가 흔히 크고 두꺼운 책을 벽돌책이라고 부르듯이 책은 실제로도 무겁다. 쌓여서 더 무겁다. 그 어마어마한 책과 책장의 규모와 무게를 생각하면 나는 가끔 한 번씩 건물이 무너지지는 않을까 진심으로 무섭기도 했다. 서점이 보통 1층이나 지하에 있는 이유에는 분명 무게가 한몫할 것이다. 그래서 서점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무릎이나 어깨와 허리는 물론이고 손목과 손가락 관절들이 남아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정말이지 서점일은 정신노동에 육체노동까지 해야 하는  직업이다.     

   

우리가 아무리 좋아해도 모든 책을 다 읽을 수 없듯이 서가에도 모든 책을 다 꽂아 둘 수가 없다. 서가를 정비할 때는 기본 입출고 흐름과 판매 수량을 바탕으로 하는 정확한 수불 데이터를 참고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중에서도 서가에 남기고 살려야 하는 책과 반대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이 과감히 비워낼 책들을 선별해 내는 눈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끝까지 책은 직접 꽂으려고 노력했다. 책을 보는 눈도 길러야 하고 손끝에 '도가 터서' 손님들이 찾는 책을 빛의 속도로 눈감고도 찾아주고 서가 위치를 내비게이션 보듯 알려드릴 수 있는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초능력은 초능력을 부른다. 근무 시간 대부분을 서서 일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만보기 앱을 확인하면 하루 8 천보쯤은 거뜬하다. 물론 노동과 운동은 다르다지만.

    



하루는 다른 직원으로부터 기존에 있던 <월든> 서가가 의미가 없다고 한 권 정도만 남기고 자리를 없애겠다는 말을 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그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종이책을 지키는 한 사람으로서 나의 자긍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적극성을 발휘해 <월든>은 서점의 바이블이자 정체성 같은 것이라고 팔리든 안 팔리든 있어야 한다 강하게 어필했다. 우선은 빼두었다가 내가 맡아서 적당한 자리를 만들어 옮겨 두겠다고 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과 <타샤 튜더>와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책들을 찾아서 끌어모아 생태 관련 전원라이프 서가로  자리를 옮겨 두고 이름을 써서 스티커를 붙여 두었다. 그 외에도 소설 서가를 정비하며 <토지>와 <아리랑>, <태백산맥>을 좀 더 잘 보이는 중앙의 큰 테이블 가까이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다행히 성사되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작지만 <김훈> 작가의 자리도 만들고 있는 책을 찾아 끌어모았다. 마지막으로 인문 서가에 <이어령> 선생님의 자리를 만들어 베스트를 제외한 모든 책을 끌어모았다. 숨바꼭질처럼 책을 찾아 모으면서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유시민> 작가와 나란히 자리를 만들었는데 서가 맨 아래여서 서점의 프라이드가 있는데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어차피 아무도 신경 쓰지도 않고 알아주지도 않는데 왜 자꾸 번거롭게 일을 만드느냐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고, 유별나게 군다며 모난 돌 취급을 당하기도 했지만 나는 굴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서점을 서점답게, 내 일을 제대로 하고 싶었다. 마찬가지 원리로 어차피 신경 쓰지 않는다면 꼭 있어야 할 자리는 이왕이면 만들어 놓아도 무방한 것 아닌가? 아무도 몰라준대도 책을 대하는 내 마음가짐과 태도는 나 자신이 아니까. 그리고 그 작가를 찾는 단 한 사람의 독자에게라도 편의와 더불어 기쁨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소설 서가를 정리하는데 곳곳에서 2022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느로>의 책이 발견되었다. 심지어 같은 책인데도 흩어져 따로 꽂혀 있었다. 나는 또 그녀의 모든 책들을 끌어모아 소설 베스트 맨 앞에 보이는 곳에 자리를 만들고 그중에 없는 책도 주문해 두었다. 애정하는 시집 서가도 틈틈이 조금씩 정비했다. 


칸이 모자라면 목공 작업을 해서 선반을 늘리고, 자리가 없으면 만들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안 보여도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보인다. 초능력은 사랑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노력이다. 셔터를 내린 후 불 꺼진 서가에 진심 어린 나의 노력의 손길. 책에도 혼이 있다면 - 물론 작가의 혼이 담기기도 했지만 - 귀한 마음으로 자신을 어루만져주는 손길을 느끼고 행복했을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은 서점의 정체성이자 바이블! / 생태주의 자연 정원라이프 서가


2022 노벨문학상 수상 아니 에르노 서가
모자르면 늘리면 되지
없으면 만들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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