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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나무 여운 Apr 23. 2024

시험해방소년단

공부의 무게

오늘은 틀린 그림 찾기입니다! 명세서 합계가 도저히 안 맞는데 X맨 좀 찾아주세요.



그들이 몰려오고 있다. 시험해방소년단! 벌써 저 멀리 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서부터 알 수 있다. 시험이 끝났다는 것을. 돌고래 소리에 가까운 즐거운 비명과 까르르 웃음소리와 왁자지껄 떠드는 소년 소녀들의 해방감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오늘만큼은 너희의 소란함을 허락하노라! 그리고 알지? 문제집은 이쪽, 만화책은 저쪽이다. 덕분에 서점 안 분위기도 절로 톤업이다. 시험이 끝났는데도 다른 가고 서점에 오다니 내 조카들이라도 되는 양 얼매나 착하고 이쁘게요. 너희들이 문제집을 많이 푸는 덕분에 이 이모가 월급을 받는단다. 사실이다.


그렇다면 문제집의 짝꿍은 무엇일까요? 바로 샤프심이다. 문구 쪽 가까운 카운터에서 학생들로부터 "샤프심 어디 있어요?"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다. 그대로 뒤돌아서 2번과 3번 통로 사이 안쪽 오른편 위예요! 계산하면서 발견한다. 얘는 2B파군. 이 아줌마는 HB 파였는데 나이가 드니 B가 좋아지긴 하더라. 덧붙여서 샤프심이 바늘이면 지우개는 실이다. 그 옆에 나란히 있어. 보이지?


그래, 바쁜 너희에게 펜 중에 끝판왕은 프릭션 멀티펜이지. 리필심도 색깔별로 굵기별로 잘 나오고 지워지는 펜도 나오고. 나는 0.38 세필파야, 참고로 최애는 스테들러. 이래 봬도 나도 꽤나 글씨 좀 쓰고 밑줄 좀 긋는단다. 그렇다고 이 나이에 문제집 풀 것도 아닌데 이걸 언제 다 쓰려고 자꾸 샤프를 사는지 모르겠다. 월급 받아서 책 다음으로 많이 사는 게 펜이란다. 나 좀 말려줄래?




시험이 끝났다고 학생들이 모두 만화책만 찾는 건 아니다. 학교별 필독도서도 있고 논술학원을 다니면서 매달 추천도서를 찾는 학생들도 있다. 그밖에는 주로 소설을 자주 찾는데 <봉제인형 살인사건>이나 <꼭두각시 살인사건> 같은 표지도 제목도 유난히 눈에 띄는 책도 있다. 학생이 고른 책을 보고 함께 온 엄마가 심히 걱정하는 모습도 있다. 그 마음 나도 이해된다. 내가 다니고 있는 독서모임 책벗 중에는 그래서 자신이 반드시 먼저 책을 읽은 후에 아이에게 물려준다는 분도 있다. 아이를 위해서 밑줄도 긋지 않고 인덱스만 붙이며 깨끗하게 읽는다. 참 부지런하고 바람직한 모습이다. 가끔 아직 어린 친구들이 <데미안>이나 <모비딕>을 찾거나 친구들과 함께 <안톤 체호프의 희곡집>을 찾을 때도 있다. 나이 불문하고 멋지고 존경스럽다. 나는 청소년 베스트 평대 위에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1984>를 자주 어루만진다. 가장 많이 채웠다. 우리 함께 읽을래?


문제집 안쪽 서가에서 한 학생이 서성이고 있었다. 무거운 책가방을 멘 학생의 뒷모습에 대한 관찰 데이터가 어느 정도 쌓이면 가방이 간당간당 겨우 매달려 있는 축 처짐의 정도만 봐도 저 학생은 고3 아니면 최소한 고2는 되겠구나 알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른다. 어릴수록 가방을 제대로 잠그지 않고 아예 열어놓고 다니는 경우도 많다.


그 학생에게 다가가 특별히 찾는 교재가 있느냐고 물으니 고2 수학 문제집을 찾는단다. 정확한 서가 위치를 알려주니 학생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한참 고르더니 몇 권을 들고 계산대로 향한다. 그런데 웬 걸? 잠시 후 다시 나타났다. 들고 갔던 몇 권 중 일부를 다시 꽂아 넣고 있었다. 나는 궁금하여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학생은 카드를 깜빡하고 놓고 왔는데 현금이 1만 원 밖에 없어서 저녁에 다시 오겠다고 했다. 꼭 다시 오렴.


얼마 전에는 멸종 위기의 국어사전을 찾는 학생도 있었다. 종이로 된 사전을 찾는 게 맞는 거지? 서점이니만큼 구색을 추느라 사전을 조금씩 들여놓기는 했지만 사실상 유물에 가깝다. 솔직히 종이로 된 사전을 찾는 학생을 처음 봤다.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스마트폰이 없다고 한다. 정말?! 경제적 문제였을까, 아니면 부모님의 교육적 철학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정말로 국어를 사랑해서 좀 더 심도 있게 직접 단어를 찾고 음미해보고 싶은 작가꿈나무였을까? 다행히 절판시키지 않고 아직 사전을 만드는 출판사에게도, 사전을 찾는 그 학생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진심이다.


카운터에서 문제집을 계산해 주다가 카드를 내밀면서 5만 원도 안 되는 금액을 할부로 해달라는 학생을 만난 적도 있다. 차마 거기서 학생에게 뭐라고 묻거나 말할 수 없어 평소처럼 자연스레 해달라는 대로 결제를 해주었지만 나는 그 학생의 부모 생각이 많이 났다. 우리 아이가 건강한 것 다음으로 먹고 싶은 것 실컷 먹게 해주고 하고 싶은 공부 실컷 하게 해주는 거 말고 부모가 더 바라는 게 있을까? 그런데 문제집 두세 권 사면서 몇만  되지 않는 금액을 아이에게 카드 할부를 시켜야 하는 부모 마음이란 오죽할까. 풀어야 할 문제집은 끝도 없고 한두 달로 끝날 공부가 아니니 말이다. 누구나 다 당연한 듯이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실컷 하고 풀고 싶고 풀어야 하는 문제집을 언제든 쉽게 다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참고서나 문제집은 도서관에서 빌릴 수도 없다. 그 학생에게도 그 부모에게도 당장 문제집 값이, 공부의 무게가 우리가 짊어진 삶의 무게만큼이나 녹록지 않다. 어른들만큼이나 학생들의 어깨도 이미 지치고 무거워 보이는 건 그 때문일까. 어른들은 9시 출근 6시 퇴근에 주 5일 근무이기라도 하지. 너희는 밤 10시에 학원 마치고도 서점에를 오던데, 잠은 충분히 자니?


너희는 매일같이 어깨를 짓누르는 그 무게를 혼연일체로 지고 다니면서도 그걸 이겨내고 거슬러올라 마치 잭의 콩나무처럼 자라는구나 소년소녀들이여. 너희가 기쁨의 비명을 내지르는 소리를 더 자주 듣고 싶다. 너희가 꿈을 가져도 되는 자주 행복한 세상이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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