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햇살나무 여운 Apr 24. 2024

서점의 오마카세, 큐레이션

서점에 다니는 사람들


요즘 여기저기서 오마카세 메뉴가 유행이라고 한다. 타코야끼랑 오코노미야끼는 먹어봤는데 이건 뭘까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정해진 메뉴가 아닌 그날그날의 주방장 특선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오마카세 메뉴가 서점에도 있다. 바로 큐레이션!


서점에 오면 너무나 많은 책이 있다. 도대체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 자주 먹어본 사람은 알아서 메뉴를 잘 고르겠지만 괜찮은 책을 고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남들이 좋다고 추천해도 내 입맛이나 취향은 아닐 수도 있다. 나 역시 자주 실패해서 사놓기만 하고 읽지 않은 책이 많다. 이런 시행착오를 그래도 좀 줄여줄 수 있고 선택의 폭도 좀 좁혀주는 게 북 큐레이션이다. 계절의 흐름이나 특정 이슈를 담은 여러 책을 선별하고 블렌딩해서 추천해 주는 코너가 바로 서점의 특선 메뉴인 셈이다.


내가 서점에서 일하게 된 계기도 바로 이 큐레이션을 하기 위해서였다. 정말 하고 싶은 1퍼센트의 창의적인 작업을 위해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99퍼센트의 나머지 모든 고강도의 업무를 견뎠다. 그리고는 불 꺼진 깊은 밤 서가에 남아 마치 우렁각시처럼 큐레이션 작업을 했다. 좋아하는 일은 시간도 고단함도 잊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것이 바로 몰입이다.


문장 수집가답게 나는 단어와 문장을 뽑고 카피를 짓는 작업을 좋아했다. 예를 들어 '여름'이라는 주제를 던져주면 그냥 여름이 아니라 그 단어를 한참을 궁굴려 <벌써, 기에 다다름!>이라는 문구를 뽑아냈다. 우렁각시가 아니라 아무래도 누에 고치였나 보다. 타이틀만 중요한 게 아니다. 속을 채우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 그러려면 책을 알아야 한다. 감히 책을 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책을 몹시 좋아하기는 했다. 모든 책을 다 읽고 알 수는 없어도 조금만 마음을 두면 어떤 책인지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는 있다. 검색만 해도 재료와 정보는 넘친다. 그걸 자신만의 레시피로 잘 버무려야 한다. 자신이 없고 감이 안 오면 메뉴에 넣으면 안 된다.


늦은 밤까지 서가를 누비며 책을 찾고 주제에 어울리는 분위기도 연출한다. 요리도 플레이팅 접시가 중요하듯이! 여름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시원한 바다 색깔의 바탕색을 깔고 책이 도드라져 보이도록 전시했다. 과연 맛있게 됐을까? 하루는 어느 작은 도서관 사서분께서 지나가다가 내가 지어놓은 큐레이션 카피를 보시고 혹시 같은 걸 좀 인쇄해 줄 수 있느냐는 부탁을 받았다. 이만하면 성공인 셈이다.


시즌과 마침 잘 맞아떨어진 덕분에 사랑스러운 그림책 안녕달 작가의 <수박수영장>이 제법 팔렸다. 그리고 내가 특별히 엄선해서 넣은 그림책은 하수정 작가의 <파도는 나에게>라는 작품이었다. 특수재질의 종이들을 겹겹이 쌓아서 책을 펼치면 정말로 파도가 펼쳐지는 그림책이다. 조개껍데기 엽서도 들어있다. 그런데 특수한 책이다 보니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들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비닐로 랩핑 되어 나왔다. 그럼 어떻게? 사야지, 내가! 내가 사서 뜯어야지 별 수 있나. 안 그럼 이 좋은 걸 보여줄 수가 없는데. 내가 큐레이션 한 책은 무조건 한 권은 반드시 산다는 두 번째 철칙이 이때 생겼다. 랩핑 된 책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 늘 아쉬움이 없잖아 있다.


나의 두 번째 큐레이션은 '나이 듦'에 대한 주제로 시니어들을 위한 특선 메뉴였다. 물론 우리 모두가 한 번쯤 함께 생각해봤으면 하는 마음에 <함께 읽으며 더불어 익어가는 삶>으로 카피를 뽑았다. '읽다'와 '익다'를 함께 라임을 맞춰 담고 싶었다. 이번엔 <백화만발 시니어 그림책> 시리즈와 함께 76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모지스 할머니의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라는 책을 꼭 넣었다. 나는 이 책을 그림을 좋아하는 친구로부터 선물 받고서 알게 되었다. 지나가시던 손님이 마침 모지스 할머니를 알아봤다. 어찌나 반갑던지 너무 좋지 않느냐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 몇 분 마음을 나눈 덕분에 손님은 그 책을 사 가셨다. 이번에 나는 <풋감으로 쓴 시>를 사서 친구에게 선물했다. 주거니 받거니 서로에게 좋은 책을 선물하는 일은 언제나 흐뭇하다. 그 책을 고르는 친구의 됨됨이도 보이고 나에 대한 친구의 마음도 보이니까.


이처럼 큐레이션보다도 내가 더 좋아하고 나를 충만하게 하는 건 그 책으로 이어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이다. 어쩌면 내가 정말로 정말로 하고 싶었던 건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어깨띠라도 메고서 서가 주변과 손님들 사이를 함께 거니는 일이었다. 그러나 역시나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해야만 하는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


이 말 모르면 간첩이다. 그러나 당신은 속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출판계가 마케팅을 위해 만든 최고의 카피이다. 가을은 출판계의 비수기이다. 아무리 수려한 문장도 단풍을 이길 수는 없다. 하늘 좋고 바람 좋고 빛깔 좋은 계절에 백화점도 아닌데 창문도 없는 서점에, 평소에도 잘 안 읽는 책을 보려고 굳이 누가 찾아오겠는가? 아무리 책을 좋아해도 나부터도 좀 나가고 싶은데. 그 발길들을 돌리고 붙잡기 위해 출판계에서 행사나 프로그램이 가장 많은 계절이 오히려 가을이다.   


10월의 끝자락, 가을 이벤트로 지역의 인지도 있는 도서관과 콜라보 큐레이션 버스킹이 있었다. 선임 사서님과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주제와 방향도 잡아보고 바로 여기서 처음 '서점에 다니는 사람들'이라는 카피를 꺼내게 되었다. 서점에서 일하면서 그동안 만나온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 제각각의 사연이 내게는 빛나는 보석 같았다. 화석처럼 박제되어 모셔놓기만 하는 고매한 지식이나 멀고 어려운 예술이나 문화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가까이 함께 누리고 나눌 수 있는 그런 지역 문화에 대한 의미를 담고 전하고 싶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출판의 위기, 종이책의 위기, 오프라인 서점의 위기를 말하는 시대에 굳이! 기꺼이! 직접 두 발로 걸어서 서점에 다니는 사람들, 바로 우리 모두의 이야기 말이다. 이심전심이라고 그 뜻을 이해하고 도서관 측에서 '기꺼이' 채택해 주셨다. 모두가 함께 하는 최고의 협업이었고, 이것으로 내 할 일은 다 하였다. 내게도 오래도록 잊지 못할 정말 특별하고 멋진 경험이 되었다. 나는 그저 이 일을 사랑했을 뿐 제대로 배워본 적도 전공을 하거나 학위를 받은 적도 없다. 그런 내게 함께 할 기회를 주셔서 참으로 영광이었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에 못 미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에 못 미친다.
       
                        - <논어>


어쩌면 디지털 미디어의 범람의 시대에 '읽기'라는 행위 자체가 위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책을 사고, 책을 읽는 당신이 바로 종이책 수호자이다. 책과 사람, 서점이라는 공간은 함께 성장하는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큐레이션 기획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