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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나무 여운 Apr 30. 2024

말은 하나 글은 두 개

문해력 백 분 토론

그날은 마침 광복절 휴일이었다. 새로운 책장으로 이사 간 책들에 새로운 서가 번호를 한참 등록하고 있었다. 서가에 꽂힌 책들은 그냥 거기에 꽂히지 않는다. PDA 단말기로 하나하나 모두 바코드를 찍어 서가번호를 주소로 입력해주어야 한다. 주소를 등록하기 이전에 이 책이 인문인지 과학인지 경제경영인지 에세이인지 소설인지 과연 어느 소속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게 제일 중요한 우선순위이다. 이 또한 매일 수없이 반복되는 서점 업무 중에서 꽤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서가마다 제목 가나다 순 또는 출판사 가나다 순, 작가 등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꽂혀 있다. 혹시라도 서가에서 책을 꺼내서 읽었다면 가능한 그 자리에 그대로 꽂는 것이 최선이지만, 자리가 기억나지 않는다면 읽은 책을 별도로 모아두는 자리에 그냥 두는 것이 도서 찾아 삼만리를 예방할 수 있는 더 괜찮은 방법이다. 도서를 검색해서 서가 번호를 뽑아도 그 자리에 책이 없는 경우가 꽤 자주 있다. 위아래나 옆칸 등 그나마 가까운 근처에 있으면 다행이지만 전혀 의외의 곳에 꽂혀 있는 경우도 제법 된다.


손님이 찾아달라는 책을 신속 정확하게 뽑아오는 것도 나름의 능력이라면 능력이랄까? 책등이 표지와는 전혀 다른 카멜레온 책도 의외로 많다. 익숙하지 않은 책이라면 먼저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책의 모양과 색깔을 확인한 후 찾는 것도 하나의 꿀팁이 될 수 있다. 해당 서가 전체 숲도 볼 줄 알아야 하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보는 눈도 있어야 한다. 이 분야에서 나름 재능을 뽐내기도 했다. 여럿이서 함께 찾아 나서도 못 찾는 책을 금세 찾아내니 손님들이 어찌 그리 잘 찾느냐며 감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나도 프레드릭처럼 얼굴을 붉히며 인사를 하고 이렇게 말해 볼까?


"나도 알아."


이 능력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하루 아침에 생긴 능력도 아니고, 겨우 몇 달 노력한다고 터득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나 혼자만의 타고남도 물론 아니다. 내 삶 전체에 걸친 오랜 경험과 내 부모의 부모로부터 혹은 훨씬 그 이전부터 누적되어 물려받은 보이지 않는 빅데이터가 내 DNA에 새겨져 소질과 적성이라는 이름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 딱히 꼭 집어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이렇듯 읽고 해독해 내는 능력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독서는 책을 펼치기 전부터 이미 시작된다. 이야기를 좋아하고 책을 가까이 즐기는 분위기에 노출되어 젖어들고 직접 책을 탐색하고 고르고 실패도 해보고 또 겉표지와 제목, 표지가 자아내는 분위기와 속지의 색감과 온도, 글씨체와 여백까지 읽기도 전부터 자신도 모르게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예측하는 과정까지 포함된다. 당신이 그 책을 선택했다면 거기엔 자신도 모르는 통찰력이 이미 작용한 셈이다. 책 한 권은 총체적인 예술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 예술을 보는 안목이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아름답지 아니한가?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읽어야 진짜 시작이다. 학자들이 빡센 노동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독서를 정말 열심히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분들을 진심으로 우러르고 싶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읽기의 소멸 속도는 더 빨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광복절 휴일이라 그런지 가족 단위 손님들이 많이 보인다.  때마침 나는 한자와 관련된 서가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을 위한 한자 관련 책이 이렇게나 많은 줄 처음 알았다. 급수별 한자능력검정시험은 물론이고 유아놀이북까지 각양각색이다.


급수별로 나누어 책을 꽂고 있는데, 아이들과 함께 온 어떤 엄마 아빠 손님이 아이에게 한자 공부를 시켜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로 한참 열띤 토론을 벌이는 모습이 눈에 띈다. 엄마 손님은 그래도 아이가 한자를 쓰기까지는 아니어도 읽기라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아빠 손님은 다른 할 게 많은데 무슨 벌써부터 한자까지 시키느냐는 입장이었다. 아빠 말씀도 일리가 있다. 우리 아이들 참 할 게 많기는 하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래도 조용히 엄마 손님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 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한자를 알고 읽을 수는 있어야 기본적인 해독이 가능하고 읽는 맛이 깊고 풍부해진다. 우리의 말은 하나여도 글은 두 개인 현실을 어느 정도는 인정해야 한다. 한글은 물론 독보적이다. 거기에 한자까지 알면 더할 나위 없지 않을까. 어휘를 갖추어야 품격도 갖춰지는 법이다.


서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문해력이다.  TV 토크쇼에서 각 과목의 일타강사들을 초대해 놓고 전체 과목들 중에서 반드시 해야 하는 과목을 단 하나만 꼽으라는 질문에 모두가 입을 모아 국어를 말한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읽기와 쓰기는 인간만이 가지는 능력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필요충분조건이다.


그날은 마침 광복절(光復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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