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햇살나무 여운 Apr 25. 2024

말할 때는 눈을 맞춰야지 나 서운해

감정은 부리는 게 아니야 표현하는 거야


가정의 달 5월이 다가오고 있다. 행사의 연속이다. 가족센터가 가장 바쁜 달이 아닐까 싶다. 육아나눔터 운영팀에서 행사에서 쓸 홍보 게시판을 좀 만들어 달라고 요청해 오셨다. 물론 기본 재료와 내용을 주시면서. 선생님들께서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셨나 보다. 근무한 지 4개월 만에 최대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아직까지 나는 나의 숙련된 기능만을 썼을 뿐 진정한 능력치를 꺼내 쓸 일이 없었다. 처음으로 나의 잠재력이 시험에 드는 순간이다. 창의력과 미술 감각, 게다가 왼손잡이에게 고난도의 가위질까지! 어린이집 실습 과제로 다시 소환되는 기분이다.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이렇게는 어떨까요 저렇게는 어떨까요 여쭤보고 좀 더 어울리는 이미지도 더 찾아서 바꿔보고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한참을 쩔쩔매면서 겨우 한다고 했는데 마지막에 투명 시트지를 입히다가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려버렸다. 시트지 달인인 금손 남편을 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주어진 재료는 이게 전부였다. 서랍을 뒤져 핀을 찾았다. 시트지 사이사이에 찬 기포를 터뜨려 우글우글 주름진 흔적을 지워보려고 아주 열심히 문질러도 보고 입김을 불어도 봤지만 이미 늦었다. 손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아서 울고 싶었다. 망친 결과물과 함께 울상이 되어 팀장님을 찾아갔다. 예쁘게 못 해서 너무 속상하고 죄송하다고. 팀장님이 또 웃음을 빵 터뜨리신다. 전혀 괜찮다고. 마음에서 어서 털어버리라고. 팀장님의 호쾌함 덕분에 부글부글 내 마음에 찬 기포도 퐁퐁 터져서 사라졌다.


그렇게 홀가분하게 털고 돌아섰는데 그다음은 문해력이다. 이번에는 지구의 날 행사를 맞아 아이들이 고사리손으로 지구에게 쓴 편지를 해독하고 분류하는 임무가 맡겨졌다. 지구야, 사랑해! 지구야, 고마워! 지구야, 미안해! 지구야, 내가 지켜줄게! 나의 문해력과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해독이 불가능한 메시지도 있다. 아이야, 쌤이 못 읽어서 미안해.

 





다음은 전화 업무가 포함되는 미션이다. 전국의 모든 가족센터의 홈페이지를 검색해서 이메일을 찾아서 주소록을 정리하는 일이다. 이번에 검색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전국에 총 240 여개의 가족센터가 있다. 가족센터는 건강가정지원센터와 다문화가정지원센터를 포괄하는 개념이고, 지역에 따라 개별로 운영되는 곳도 있다.


IT 강국답게 모든 홈페이지와 이메일이 아주 잘 등록되어 있을 것도 같지만 아니었다. 이리저리 검색해 봐도 나오지 않으면 직접 전화를 걸어서 물어봐야 한다. 나는 전화 통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울렁증이 있어 모르는 상대와 즉흥적으로 통화를 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상대를 관찰할 수가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익명의 갑질과 진상도 많이 겪어봤기 때문에. 직접 대면해서 관찰하고 파악한 후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안전하다. 말보다는 글, 통화보다는 메시지를 선호한다. 즉흥적인 말보다 좀 더 느리고 신중한 글이 실수를 덜 할 수 있으니까. 우리 서로 성숙한 지성인들답게 갑질하지 말고 존중하고, 반응하지 말고 대응합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번 업무는 아는 게 없는 상태에서 받는 전화가 아니라 내가 거는 전화였고, 상대방은 모두 친절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었다. 호흡을 고르며 마음속으로 침착하게 멘트를 몇 번 읊조린 후 전화를 건다. 훨씬 낫다. 이거는 할 만하네.




한참 활기차고 분주한 분위기 속에서 저 뒤편에서 환경미화 여사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쌤! 얘기할 때는 사람 눈을 보고 이야기해야지. 나 서운하려고 해."


저 안쪽 뒤편에 있는 선생님과 나누는 이야기였다. 이 말만 곧이곧대로 읽으면 매우 심각한 분위기일 것 같지만 아니다. 그 여사님도 그럴 분이 아니고, 그 어여쁜 선생님 역시 더더욱 그럴 분이 아니다. 서로 바쁜 가운데에서도 쌓이지 않게 그때그때 툭툭 털어버리듯이 가벼운 농담을 섞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감정이나 승질머리를 휘두르거나 부리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말로 전달하는 것이다. 그 순간 아마도 몹시 바빴던 그 선생님이 잠시 후 곧바로 여사님께 다가와 막내딸처럼 몸을 기대며 좀 전에는 정말 너무나 바빴다고 죄송하다고 또 금세 제대로 사과하고 또 서로 금세 제대로 풀었다. 나는 그 모습이 참 건강하다고 느꼈다. 상대방도 모르게 혼자서만 속으로 꽁하니 묻어두거나 쌓아두지 않고, 오해나 서운함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전에 자주자주 사소하게 잔잔하고 가볍게 감정을 표현하는 모습들이 참 좋은 것 같다. 마음에서 어서 털어버리라고 웃으며 말씀해 주시던 그 팀장님처럼.


바로 옆자리 막내 선생님도 업무 중에 뭔가 실수와 클레임이 있었는지 몹시 속상해하며 힘들어하는 모습이다. 스트레스받으며 한참 괴로워하니 선배 팀원들이 너도 나도 다가와 어깨를 토닥여 준다. 거기서 그치면 서운하지. 자꾸 뭘 먹인다. 엄청 달달한 거 사준다고 울지 말라고. 괜찮다고 해도 굳이 꼭 먹어야 한다고 사준다. 점심에는 해장국! 또 엄청나게 달달한 오후 간식!


곳곳에 사랑이 넘치는 4월이다.




이전 12화 월급날에는 딸기라떼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