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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나무 여운 Sep 24. 2024

배려 인지 감수성

인계선에 닿을 때


올해가 14주 남았다. 1년 계약을 하고 이곳 가족센터에 처음 출근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월이 코 앞이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가속도가 붙는 느낌이다.


어쩌면 내 나이와 지나온 경력에 비추어 보면 굳이 이 일은 하지 않아도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는 크게 돈이 되는 일도 아니고, 나의 능력치를 크게 향상시키는 업무 영역도 아니니 말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무보조 업무는 내가 아니더라도 언제라도 대체가능하다. 오히려 그 시간과 에너지를 좀 더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다른 방향에 집중하는 게 더 나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든 무엇으로부터든 늘 배우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지킨다면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곳에서 일하면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균형감각이다. 적절하고 안정적인 리듬으로 나의 사회생활 감각을 잃지 않고 조직 내에서의 책임감을 일관된 태도로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했고,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사회복지 분야에 대해 다양한 사례들을 직접 관찰하고 경험치를 쌓아가는 공부도 되었다.



어떤 날에는 몇 시간째 서류를 묶거나 도장을 열심히 찍는 날도 있고, 어떤 날에는 계산기로 더하기만 실컷 하는 날도 있다. 또 어떤 날에는 포장지만 잔뜩 입히는 날도 있다. 오늘은 핑크고래 이다. 서류를 묶는 일은 이제 도가 터서 예쁘게 잘 묶는다고 소문이 날 경지에 다다랐고, 도장을 찍을 때는 이왕이면 보기 좋게 서류를 좀 더 가지런히 정돈하고 같은 자리에 통일감 있게 찍으려고 노력한다. 계산기를 두드릴 때는 아직 살아있는 암산 능력을 좀 더 연마하기도 하고, 포장지를 입힐 때는 나의 금손을 소환하여 산뜻하고 말끔하게 마감하려고 노력해서 이왕이면 선물을 받는 사람에게 사소한 기쁨을 조금 더 선사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기도 한다.



아무리 하찮고 시시한 일일지라도, 그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내가 귀한 마음 귀한 손길로 하면 스스로 나 자신에게 가치와 신의를 부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일이라도 어떤 일이라도 같은 가치와 태도로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나를 길들이고 단련시키는 과정이 진정한 성숙이 아닐까?


가끔 자존심이 솟구칠 때 솔직히 '내가 이런 일이나 하고 있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미세하지만 내 마음의 인계선을 건드릴 때가 드물긴 해도 있긴 있다. 상대방에게서 나를 '그런 일이나 하는 사람'으로 대하는 태도가 언뜻 느껴질 때라고 해야 할까? 드러내지는 않지만 내가 너무 민감하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배려 인지 감수성이라고 해두자. 말투뿐만 아니라 목소리 톤이나 손짓 만으로도 정말 많은 정보를 자신도 모르게 건네받게 되니 말이다. 아주 미묘한 태도라도 쉽게 들킨다. 결국 나를 이루는 것은 평소에 의식하지 못하는 사소하고 하찮은 말과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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