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육교를 건너는 중인데 누군가가 발걸음을 붙든다. 장애인인식개선을 위한 설문조사라고 한다. 출근시간이라 그냥 지나치려다가 아무래도 '장애인'이라는 단어와 '인식개선'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린다. 필행일치 해야하지 않겠는가? 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가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한 복지재단에서 장애가 있는 아픈 아이를 위한 응원메시지와 서명을 받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 덧붙여서 가능하다면 실질적인 도움의 손길까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이 길 위에서 무엇을 누구를 어떻게 믿고? 순간 마음이 약해져서 선뜻 내민 손길이 과연 정말로 이 아이에게 제대로 가 닿을까?
이곳저곳 티클만큼이긴 해도 나 역시 기부를 하고는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한 구석에 품은 기부에 대한 불신 또한 떨칠 수 없는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하는 게 그래도 낫겠지 싶은 희망으로, 그저 내 마음 한 줌 편하자고 잊어버리고 있는 자동이체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자꾸만 욕심을 부려 누군가를 구하고 싶다. 합리적인 의심과 근거 있는 불신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고 싶은 순진한 희망 사이에서.
세상은 정말 나아지고 있긴 한 걸까?
모두를 구할 수는 없다. 그런 가당치도 않는 허무맹랑한 꿈은 꾸지도 않는다. 대신에 지금 내 앞에 닥친 딱 한 사람만 구하기로 한다. 가장 먼저 나 자신을 구했고, 남편을 구했다.우리는 서로를 구하고 있다.
스스로를 구하지 않는 한 아무도 나를 구해주지 않는다.고독사까지 가기도 전에 이미 고독삶이다.때때로머리로는 알아도 진정 가슴으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고 느껴질 때, 그 사실이 나는 다른 무엇보다 슬프고 외롭다.
옆 돌봄팀에서 회의에 들어가면서 전화응대를 부탁해 왔다. 회의가 좀 길어져 두 시간이 다 되어가는 동안 혼자서 스무 통 가까운 전화를 받았다. 담당자분들이 회의 중이라고 양해를 구하고 간단한 내용을 메모하고 회신드리겠다고 하면 보호자도 아이돌보미 선생님들도 대부분은 선뜻 알겠다고 감사 인사와 함께 짧게 전화를 끊는다.
그런데, 오늘은 때마침 아이돌보미 한 분이 딱 걸리셨다. 내용인즉슨 어제 오후쯤 서비스를 요청한 보호자와 연계가 되어 자신의 어플에서도 스케줄이 뜨는데, 오늘 아침 내용을 확인 차 돌봄팀의 누군가와 통화를 했는데 아무것도 안 뜬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통화한 그분이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아직도 자신의 스케줄에는 계속 뜨는데 왜 안 보인다고 하느냐며 불안해하셨다. 처음에는 그 입장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아무래도 전산 상에서 착오가 있거나 오류가 있을 수도 있으니 팀 회의 마치는 대로 바로 전화를 드리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분은 갑자기 그 업무를 정확히 어느 분이 담당을 하느냐며, 매번 전화받는 사람이 바뀌는데 거기에 도대체 몇 명이 있느냐, 누가 무슨 업무를 맡는지 날더러 왜 모르느냐며 막무가내로 따지기 시작하셨다. 나는 돌봄팀 소속이 아니고 대표전화를 임시로 당겨 받은 상황이라고 거듭 설명드리고 죄송하다고 몇 번 사과하고 양해를 구해도 소용이 없었다. 담당자분이 오시면 여쭤보고 최대한 일찍 답을 드리겠다고 해도 이번에는 또 자신이 누군지 어느 지역인지 어떻게 알고 물어보겠느냐고 따졌다. 나는 이미 통화 시작하면서 그분의 전화번호와 기수와 성함을 적어놓은 상태였다. 그분이 자신의 불안과 불쾌감을 때마침 만난 이름도 얼굴도 안 보이는 만만한 상대에게 쏟아내고 싶으셨다는 마음은 이해는 했다. 이제는 마음에서 수신차단이 되는 경지라서 기분이 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분의 그런 태도가 용납되는 것은 아니었다. 겪어볼수록 정말 각각 사람 나름이다. 직업이나 지위가 인격이나 인성에 반드시 상응하는 것은 아니다. 선입견을 내려놓고 직접 부딪혀 겪어봐야 안다. "JS is everywhere!"는 진리다.
바로 그때 구세군이 짠! 나타나셨다. 우리 팀 팀장님이셨다. 통화를 듣다 듣다 속이 상하셨는지 쩔쩔매고 있는 나를 대신해 모두를 향해 들으라는 듯이 일부러 큰 소리로 외쳐주셨다. 지금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팀원을, 그것도 고작 보조인력인데도 불구하고 팔을 걷어부치고 나서서 편들어주고 구해주는 상사는 오랜 직장생활을 통틀어 거의 처음이었다. 점심시간 무렵 자연스럽게 지나가며 마주친 팀장님께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렸다. 아휴, 아니라며 팀장님은 오히려 손사래를 치신다.
의외로 진상 전화가 제법 걸려 온다. 팀원들이 하다 하다 감당이 안 될 때는 팀장님들께서 맡아서 곤란함을 무릅쓰고 응대를 해주신다. 우리는 누군가의 '을'이 아니다. 단호하고 균형 잡힌 응대가 때로는 답이다. 우리가 바라는 건 일방적인 우격다짐이 아니라, 최소한의 존중과 예의를 갖춘 '말이 되는' 합리적인 쌍방소통이다.
설문조사 '가족은' 삼행시
p.s. 팀에서 진행하고 있는 설문조사에 급하게 소환되었다. 이정도면 나에게는 난이도 下?
빛의 속도로 답해드렸다. 뜻밖의 쓸모를 발휘하여, 오늘도 "1 도움" 하였습니다. 므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