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우리 동네
광인(狂人)이 가고 광인(光人)이 왔다. 지난 3년 간에도 안 하던 일을 새로 뽑힌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5G 광케이블의 속도로 사흘 만에 해내고 있는 모습이다. 첫날 야근에 퇴근도 없이 휴식도 없이 릴레이 김밥회의라니! 주변에서는 갑자기 일이 많아져 괴롭기도 하겠지만, 일이 없는 것보다는 할 일이 있다는 게 차라리 행복하다는 걸 경험해 봐서 안다. 그리고 일 안 하고 출퇴근조차 안 지키는 사장보다는 제때 출퇴근하고 함께 열심히 일하며 솔선수범하는 사장이 있는 회사가 '정상적'이고 건강하다는 건 굳이 말할 것도 없다.
지난 6개월 간의 공포와 긴장과 폭력과 혐오에서 벗어나, 많은 사람들이 모처럼 평화롭고 자유로운 연휴를 만끽하러 떠났는지 꽤 조용하다. 덕분에 우리는 일이 없는데도 싫지 않다. 우리 모두의 마음이 그렇듯이 이 평화로움이 오히려 반갑고 다행이고 고맙다. 3박 4일 내내 간단한 견적 문의 말고는 단 한 건의 작업 없이 한가롭고 게으른 시간을 보냈다. 이게 얼마만인지! 참으로 이로운 한가로움이다.
연휴가 오기 전 6월 3일 아침 7시, 투표를 마치자마자 페인트 작업이 잡혀있었다. 예전에 우리 사무실이 있던 지하상가 자리였다. 젊은 새댁이 뷰티숍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아침 일찍부터 직업군인이었다던 젊은 남편이 줄자와 전동 드라이버를 들고 직접 여기저기 손을 보고 가구를 들여놓을 자리를 측정하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활기찬 의욕을 내비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직육면체 공간 사방을 먼저 보양작업을 하고, 곰팡이 잔뜩 핀 천장 벽지부터 뜯어냈다. 이곳까지 마저 칠하면 지하 일곱 칸의 상가 중 네 칸을 우리가 페인트칠을 해준 셈이 된다. 작년에 우리가 있을 때부터 뭔가 변화성이 커지고 활기가 넘친다는 느낌이 드는 건 단순히 기분 탓일까? 오랜만에 상가 총무를 맡고 있는 2층 보습학원 원장님과도 얼굴을 뵙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사수는 만능 맥가이버라고, 사수를 알고부터는 아무 걱정 없이 총무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며 흥겹게 이야기하시는 원장님! 알고 보니 부동산 사장님과 원장님을 비롯해 주변 여기저기서 뷰티숍 부부에게 우리를 소개해주었다고 한다. 참 고마운 일이다. 3층 태권도 관장님도 상가뿐만 아니라 이제는 집까지 고쳐달라며 사수를 찾으시니 처음 이곳 지하에서부터 시작한 지난 1년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밑작업 후 조수가 작은 붓을 들고 큰 롤러가 닿지 않는 구석구석과 세밀한 곳을 먼저 칠하고 나면, 사수는 큰 롤러를 들고 거침없이 쓱쓱 천장과 벽의 넓은 면적을 두 번 세 번 덧칠해 나갔다. 이제는 세상 커다란 도화지에 미술시간이 즐겁기까지 하다. 틈새 시간에 그림도 그리고 낙서도 하고!
점심 무렵 길 건너 2단지 상가에 새로 막 오픈한 김밥집에 들렀다.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데 문 앞에 개업축하 화분이 눈에 띈다. 커다란 리본에 쓰인 문구가 참 정겹다.
아버지에 아들까지 온 가족이 나서서 사장님이 된 엄마를 돕고 있다. 이제 갓 시작인데 좀 느리고 서툴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자. 지난번에도 이 자리는 분식집이었는데, 부디 이번 김밥집은 오래가길 바래본다. 또 마침 바로 그 옆은 우리가 며칠 전에 전기작업을 해준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였다. 거기도 젊은 새댁이었다. 상가 2층 역시 지난여름 극한의 철거작업과 사무실 페인트 작업을 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추억이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건 다 지나왔다는 뜻이다. 그 안에 빠져있을 때는 괴롭고 힘들었지만, 이제는 지나와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으니 괜찮다는 의미다. 그만큼 거듭나고 성장한 것이다.
문득 이제야 여기가 우리 동네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뷰티숍 부부, 아이스크림 가게 새댁, 김밥집 가족! 어려운 시기를 뚫고 지나와 새맘 새 뜻으로 뭐라도 해보겠다고 시작하는 사람들, 우리 동네 이웃들! 그 첫걸음에 성공과 대박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우리의 손길을 보탤 수 있다니 기쁘다. 더불어 함께 살며 서로 돕고 살릴 수 있는 상생의 길이 따로 없다.
우리가 그러했듯이 뭔가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낯선 길에 들어설 때 실패에 대한 막막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걱정이라는 명목으로 덮어놓고 부정하고 반대하는 무수한 세력에 부딪힌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그거 해서 먹고살겠느냐고, 해본 적도 없으면서 돈만 날리고 실패할 것이라고 다들 한 마디씩 보태기는 쉽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과연 뭐 얼마나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보자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그런가 보다. 그 모든 마음을 알고 이해하고 겪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까지 다 품고 덮고 나 한 사람쯤은 기꺼이 응원해 주는 쪽에 서고 싶다. 그 한 사람이 나 역시 간절했듯이 말이다.
그 누가 보태지 않아도 가장 두려운 것은 자기 자신이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변수까지도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뭐라도 해보겠다는데 한 번쯤은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믿고 지지하며 지켜봐 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사수가 처음 집수리 일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조수 역시 걱정이 앞섰다. 뭘 해도 해낼 사람임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완전히 믿어주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엔 서로 완충하는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조수는 1년 가까이 조수와 구경꾼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 꽤 외로웠을 사수는 스스로 매일 시도하고 노력하며 증명해 냈고, 조수가 두 발 온전히 다 담글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거기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치열하게 희생하고 노력했는지 이제는 안다. 자신의 책무는 등한시하면서 남의 것을 쉽게 탐하고 희생하고 이용해서가 아니라, 맡은 바 책무를 지키면서도 정당한 방법으로 자신의 온 힘과 노력을 쏟아부어 일궈온 길임을 직접 보았기에 이제는 믿고 응원한다. 두 손 두 발 다 함께 걷어붙이고서!
뭐라도 해 보겠다는데 돕지는 못할망정 나서서 재는 뿌리지 말자.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라도. 남의 나라 아니고 우리나라고, 남의 동네 아니고 우리 동네다. 남의 일 아니고 우리 이웃의 일이고 나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