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친구 안심 동행 서비스

부부도배단

by 햇살나무 여운


조수의 쓸모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 있다.


"오늘은 꼭 함께 가줘야 해요."


"여기는 같이 가줘요."


사다리 작업이나 손이 더 필요한 고난도 작업 이외에도 사수가 반드시 동행을 요청해 오는 경우는 상대방의 방패를 무장해제시키는 마법이 필요할 때다. (조수의 정체는 마법사였다? 스승은 사수 아니고, 화이트 마법사 간달프와 덤블도어 교장 선생님!) 우리만의 차별화된 서비스는 이름하여 "여성 안심 동행 서비스"!! 명함에도 곱게 새겨져 있다.


요즘은 1인 가구가 많다. 게다가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사는 여성도 많고, 자녀들이 모두 독립하고 홀로 거주하시는 어르신 가구도 많다. 가까운 곳에 또는 같은 아파트 내에 조금 떨어져 살면서 자녀 집으로 출퇴근을 하시는 모습을 자주 만난다. 작년 2024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대한민국은 공식적으로 초고령 사회에 진입했다고 한다. 65세 이상의 인구가 전체의 20 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다섯 명 중 한 명이 65세 이상인 셈이다. 그래서 국민연금 제도와 관련해 변화의 필요성이 계속 이슈화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 어느 집이라도 사람이 살고 생활하는 모든 집은 수리를 필요로 한다. 세월 속에서 사람과 함께 집도 여기저기 고장 나고 낡아간다. 집수리를 가면 어르신들은 대부분 사람을 그리워하고 반가워 하시지만, 혼자 있는 여성이라든지 타고난 성향이 낯가림이 심하거나 아직 아이가 어려 육아에 지치고 힘든 젊은 엄마들의 경우는 혼자 있는 집에 낯선 아저씨를 들이는 일이 조금 신경쓰이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나부터도 그런 면이 있으니까. 그래서 조수가 그들의 마음으로 그들 편이 되어 출동한다. 온 동네 동물 친구들은 물론이고 어르신들과도 금세 친해지는 사수 역시 무장해제력이 조수 못지않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조수가 앞선다고 봐야 하나. 조금 더 정확히 짚어보자면 사수는 무장해제 '시키는' 마법이고, 조수는 무장해제 '당하는' 마법이다.


여성 1인 가구나 아이와 엄마만 단 둘이 있는 경우 조수는 가능한 늘 함께 방문한다. 초인종 앞에서부터 얼굴을 비추고 반갑게 인사하고, 원룸이나 좁은 집의 경우는 문을 살짝 열어두고 개방감을 확보하는 것도 불안을 낮추는 좋은 방법이다. 조수는 아이들과 동물들 앞에서 방패도 없고 경계도 없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다. 그리고 아이들과 동물들은 나보다도 먼저 그것을 알아차린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사라도 아이와 동물은 이길 수 없다. 친구가 될 뿐. 제주도 여행에서 말을 탔을 때도 그랬다. 이토록 기민한 동물은 나를 태우자마자 조련사의 호령도 아랑곳하지 않고 옆길로 새서 내내 자유롭게 풀만 뜯어먹었다.


순식간에 들켜버린 조수에게 아이나 반려동물들은 어김없이 다가와 안기고 휘감고 웃고 좋아한다. 주변에서 맴돌며 자신이 아끼는 장난감이나 인형도 선뜻 내어준다. 이들도 내가 더 좋아한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안전감이 형성되는 순간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엄마나 집주인 역시 마음의 빗장을 풀고 긴장을 내려놓고 조금 부드럽고 편안해진다. 분위기가 부드러워지고 소통이 원활해지면 작업도 훨씬 수월하다. 상대방이 방패를 내려놓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먼저 방패를 내려놓는 것이다.


참 재미있는 것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상대방은 안전하고 괜찮다고 느끼는 경우 본모습을 더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조금 본능적으로 말하자면 상대가 자신보다 약하니 '이렇게 해도 된다'라고 인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아이와 동물은 경계심이 풀리면 사랑을 더 드러내는 반면, 몇몇의 사람들은 최소한의 예의와 친절이라는 사회적 가면을 벗어던지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밑바닥까지 뒤집어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아직은 여전히, 진심이라는 방패에 빛나는 진심을 비춰주는 사람들의 마음의 힘이 더 크고 강하기에 다시 회복하고 믿음을 지키며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집수리 일을 다니면서 몹시 고된 일상 중에도 '이 일 하길 참 잘했다' 싶은 순간들이 있다. 어제도 그런 하루였다.


작년 겨울쯤 누수 사고가 있었는데 마땅한 업체를 못 찾아 몇 개월을 그냥 두고 보내던 친구가 도움을 요청해 왔다. 불암산이 바라다보이는 서울에 살고 있는 1인 가구 여성이다. 노후된 아파트 위층 보일러 분배기에서 누수가 있었는데, 너무 작은 부위라서 번거롭게 손만 많이 가고 돈이 될 것 같지 않아 보이니 선뜻 나서는 업체가 없었던 모양이다. 제법 거리도 멀고, 도배 작업까지 필요한 일이어서 친구도 망설이다가 혹시나 싶어 우리에게 물어온 것이다. 누수 복구 작업은 원인과 범위를 특정하기가 애매해서 사수도 꽤나 신중하게 맡는 작업이다. 그러나 이번엔 거절은 없다. 왜? 친구니까! 무조건 한다. 무조건 된다만 있다. 다행히 견적 작업을 하는 동안 위층 주인도 합리적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약속한 날에도 잘 부탁드린다며 당부도 해 오셨다. 그 집 역시 할머니 혼자 계시고 따님이 자주 왕래하며 돌본다고 하신다. 말이 통하는 이웃을 만난 친구가 참 다행이다.


겉으로 드러난 얼룩은 손바닥만 했지만, 역시 보는 눈이 있는 사수는 뜯어보면 속은 전부 곰팡이 투성이일 거라고 넉넉히 만반의 준비를 해서 길을 나섰다. 자재와 장비를 챙겨 현장에 들어서니 천장도 천장이지만 오히려 옆 벽이 더 문제였다. 분배기실과 작은 방 사이에 벽을 두고 양쪽 천장과 벽을 타고 누런 물기가 배어 나와 옅은 얼룩의 흔적이 꽤 넓었다. 성격만큼이나 살림도 단정한 친구가 몇 개월을 곰팡이 냄새의 원인을 못 찾고 음식물 쓰레기만 얼른얼른 가져다 버리느라 바빴다고 하니 꽤 머리가 아팠겠구나 싶었다.


천장과 문틀 위 벽을 뜯어내고, 곰팡이를 닦아내고 한동안 마르도록 두었다. 그 사이 차도 마시고 과일도 먹으며 오랜만에 이야기도 나눴다. 이곳저곳 공사부위가 조금 복잡해졌지만, 몇 개월 시간을 둔 덕분에 비교적 잘 말라 있어서 공사를 당일 안에 끝낼 수 있겠다 싶었다. 빈 속을 우레탄폼으로 채우고 석고보드를 잘라 덧대고, 필러로 단차까지 세밀하게 맞춘 후, 드디어 마침내 부부도배단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조수도 미처 몰랐다. 도배까지 하게 될 줄은. 그러면서 사수는 익숙한 듯이 도배지도 재단하고 있고, 그 사이 조수는 많이 해 본 듯 딱 적당한 농도로 도배풀을 반죽하고 있다. 부침개 반죽하는 솜씨가 여기서 쓰일 줄은. 그동안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였구나. 작은 누수사고로 부분도배 문의가 오면 사수는 밑작업과 목공까지만 하고, 도배작업은 주변에 더 잘하시는 분들께 소개하고 연결만 해드렸었다. 넓게 여기저기 부분부분 해야 하다 보니 예상보다 작업시간이 길어졌다. 게다가 기존 도배가 네 겹이나 덧방이 되어있는 상태여서 벗겨내기도 조금 어려웠다. 단차를 줄이기 위해 우리 역시 두 겹으로 작업을 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여기며 사수답게 더 철저히 더 꼼꼼히 세공에 예술을 하셨다. 역시 조수의 걱정은 기우였다. (조수는 아직도 사수를 다 못 믿나?)




도배지는 마르면 팽팽해집니다.


이참에 우리가 봐줄 수 있으니 불편한 곳 있으면 얘기하라고 하니, 친구도 그동안 조금씩 신경 쓰였던 곳들을 마음 편히 부탁해 왔다. 세면대와 변기 실리콘과 베란다 새시 실리콘을 새로 보수해 주고, 친구가 손님 왔다고 무겁게 사들고 온 수박을 시원하게 나눠 먹었다. (칼 좀 쓰는 사수의 수박 절단도 기본 서비스!) 숨은 곰팡이벽을 말끔히 처리하고 나니 내 속이 다 후련했다. 마치 내 집처럼. 친구네 집이 내 집이니까. 내 사람 내 집이라고 여길 만큼 나를 안전하게 무장해제시키는 친구이니까. 아이가 없는 우리도, 결혼을 안 한 친구도 앞으로 중년을 바라보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며 노후를 셀프 구제해야만 한다. 몸이든 집이든 서로 챙기고 잘 돌보면서 건강해야 한다. 오래오래 믿을 구석이라고는 오직 그것뿐이다.


일요일인 오늘도 출동이다. 1인 젊은 여성 가구에 여행과 수집이 취미다. 해리포터의 마법 지팡이도 소장하고 있는 친구를 만났다.


친구의 허락을 구하고 만져보았습니다^^





p.s. 집 안이든 집 밖이든 무엇이든 가능한 전천후 사수! 동료 업자와 공원 데크 작업을 하다가 건설회사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는데? 저희는 어디까지나 소소한 집수리만 합니다.



keyword
이전 12화실리콘 같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