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나의 조력자!
좀 쉬라는 배려일까요? 글을 써야 하는데 노트북 화면이 나갔습니다. A/S 센터에 맡기고 오는 길입니다.
내가 핑크 옷도 입혀주고 얼마나 애지중지했는데, 너 왜 그램? 너도 너무 더워서 그램?
책이 출간되면서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오늘은 짧게나마 이 이야기를 꼭 전하고 싶습니다.
모든 시작은 브런치에서였습니다. 저 역시 그렇듯이, 최근에 책을 통해 알게 된 여러 출간작가님들이 모두 브런치를 거쳐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브런치는 출간으로 가는 확실한 발판이자 관문으로 보입니다. 비록 지금까지 계속 브런치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시지는 않더라도 많은 분들이 브런치에 여전히 적을 두고 계신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브런치에서의 장점을 꼽으라면, 스스로 기획력을 키우고 연마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 책을 예로 들자면, 세 권의 브런치북이 모여서 종이책 《서점일기》한 권이 되었습니다. 기획하는 그 감각을 기르는 데에 브런치가 실전적 경험치가 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스스로 편집자의 관점을 가져보는 것이지요. 실제로 그렇게 해서 기획서에 작성한 챕터와 목차 그대로 책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소제목 몇 개만 바뀌었지요. 고유한 소재와 디테일로 브런치북으로 틀을 잡고 각을 세우면, 그곳에서는 딴 얘기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소재와 글감으로 오롯이 그 이야기에만 집중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지요. 딴 길로 새지 않고! 그게 가장 괴롭지만 꼭 필요한 훈련이 되는 듯합니다. 하나의 글에 너무 많은 얘기를 하려고 하지 않는 인내심과 조리질! 브런치에서 습관이 그렇게 들어서인지 이상하게도 블로그에서는 그렇게 잘 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냥 계속 썼습니다. 단순무식하게? 뭐라도 썼습니다. 구려도 썼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어서. 그 한 가지만큼은 흔들림 없이 단순하고도 명료한 우선순위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어지러울 일도 없었고, 크게 흔들릴 일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쓰다!라는 그 동사 자체에 의미를 두고.
그리고, 그 무엇보다 작가님들과 독자님들이 계셨지요. 존 버닝햄의 그림책 《크리스마스 선물》에 보면 수많은 조력자들이 나옵니다. 이곳 브런치에서 작가님과 독자님들이 제게 헬리콥터도 되어주고, 자전거도 되어주고, 기차도 되어주고, 열기구와 썰매도 되어 주었습니다. 온전히 글만 보고 글로써 진솔하게 소통할 수 있는 브런치라는 공간의 힘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한 분 한 분이 제게는 든든한 천군만마 같습니다. 덕분에 계속 쓰는 연재력을 기를 수 있었지요. 산타 할아버지가 중간에 낙오하지 않고 무사히 집에 당도할 수 있었던 것처럼이요.
프로에게는 재현력, 투수에게는 제구력, 작가에게는 연재력! 그것을 연마하기 위해서 속세에 나를 던져두고 일단 씁니다. 밟혀도 쓰고, 긁혀도 쓰고, 부러져도 쓰고, 조용해도 씁니다. 계속 씁니다. 지금도 씁니다. 지금 흔들리나요? 뒤를 돌아보셔요. 당신이 걸어온 여정이, 당신의 길이 그곳에 있습니다. 어설픈 그대로 시작에서부터 느리더라도 계속 조금씩 성장해 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시도와 변화 속에서 그저 묵묵히 꾸준히 브런치의 기본기에 충실하며 오늘도 나아갑니다. 인기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카이빙이자 연마장으로서! 고맙습니다.
쓰는 자는 누구나 '짐승의 계절'을 겪는다. 그다음에야 '첫'을 가질 수 있다. 첫 책엔 이런 게 들어 있다. 두 번은 가질 수 없는 열정, 섣부름, 용감함, 이빨, 두려움, 무심함, 무색함, 치욕, 질주, 어림, 치기, 유치, 불사조, 깨진 무릎, 누더기, 왕관, 흐린 무지개, 진눈깨비, 허기, 울부짖음, 그리고 작가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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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책은 눈 감은 상태에서 쓰여야 한다고 믿는다('감은 눈'이 아니라 '눈 감은' 상태인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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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책은 모르고 핀 꽃이다. 처음이란 가속력의 바퀴를 달거나 '무지'라는 날개를 달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무지에 속력이 붙으면? 모른 채로 훨훨, 모르는 곳에 당도하게 된다. 몇 해는 지나봐야 도착한 곳이 어딘지 알 수 있다.
- 박연준 《고요한 포옹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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