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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예지 Apr 12. 2024

아, 떨려! 우리 좀 걸을까?


“엄마! 내일 늦잠 잘 거야?”

“아니, 늦잠 안 잘 거야. 5시 10분에 일어날게. 알람 지금 맞춰놓을게.“


이어 “와, 엄마 긴장돼. 떨려. 나 잘할 수 있겠지? 내일 누가 나올까?”라며 내일을 얘기하다 호제는 잠들었다.


드디어 대회날 새벽 4시 55분.


“엄마! 몇 시야? 늦잠 잘 거야?”

“4시 55분. 곧 일어날 거야.”라고 얘기하고 누워서 2배속으로 환승연애를 봤다. (아, 쓰다 보니 대회 나가는 아들 둔 엄마가 환승연애라니… 참나… )


새벽 5시 15분.

”엄마, 늦잠 잘 거야? 나 이제 일어날까?“

”아니, 이제 나 씻으러 갈 거니까, 그동안 좀 더 자.“


그렇게 호제는 5:45분에 일어나 대회날 아침을 맞이했다. 떨리는 마음은 호제 눈을 저절로 뜨게 만들었다.






초1-2학년 에페는 총 29명. 3집단으로 나누어 예선전을 진행했다. 호제는 예선전에서 3승 2패를 했다.


승 4:1

승 4:0

패 3:4

패 1:4 (왼손잡이)

승 4:1


호제는 예선전을 끝내고 대기석으로 올라왔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한 벌건 얼굴로 원장님을 높이 올려다보며 본인이 예선전에 통과했는지 물었다.


“선생님, 저 통과했어요??”


요셉 원장님만큼 클거라는 호제. 호제야, 원장님 키…193cm야. 후천적 노력은 유전자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가. Photo by Hannah



아직 결과를 확인하지 않았지만, 원장님은 3승 2패면 예선 통과라고 말씀하셨다. 그제야 벌건 얼굴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본선 대진표가 나왔다. 호제는 예선에서 10등을 했다. 시드(seed)를 받아 16강 자동진출을 내심 바랐지만,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32강부터 시작하는 차곡차곡 대진이었다.






카톡으로 도착한 대진 사진을 본 호제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끊임없이 상상했다. 여전히 긴장과 생각이 가득한 듯해 걷자고 제안했다.


“호제야, 우리 좀 걸을까?”


호제가 끄덕였다. 호제의 오른손과 나의 왼손을 맞잡고 잠실 실내체육관 실내를 돌았다. 언제까지 호제 손을 잡고, 호제의 고민을 나누며 걸을 수 있을까 싶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32강에 누가 올라와?“

”23등 했던 친구를 만나네. 호제야 누구를 만나던, 상대보다 호제의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해 보자.


호제는 예선전에서 만났던 선수들 이름을 알고 싶어 했다. 예선전을 같이 뛰었던 대진표는 단체채팅방에 공유되지 않아 몰랐다.


“그다음 16강은 누구야?”

“16강에서는 예선전 7위 했던 친구를 만나네. 8강은 누가 붙을지 아직 몰라.“


“엄마, 만약에 지면 뭐 해?”

“호제야, 진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말자. 진다는 프레임이 들어오면, 진다는 쪽으로 생각이 커질 수 있으니까.”


“아니,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거지. 져도 여기서 좀 놀다 가자.”

“응, 그러자.”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고,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건 괜찮지 않나 싶어, 내 대답이 썩 맘에 들지 않았다. 지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생각이 얼마나 순식간에 나를 잡아먹을 수 있는지 경험해 본 적이 있기에 더 나은 말을 찾으려 노력했다.


“호제야, 아침에 보여줬던 댓글 기억나? 정훈 선생님이 시합에서는 지는 건 없다. 이기거나 배우는 것 밖에 없다고 한 거?”

“응, 기억나.”

“그래, 그거야. 져도 배우고, 이겨도 배우자.”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를 돌고도 호제는 말했다.


“엄마, 우리 더 돌자.”


총 여섯 바퀴, 30분을 걸었다. 여섯 바퀴를 도는 동안 호제와 나는 손을 꼭 잡고 서로의 생각을 묻고 답하고, 선생님들이 코칭하셨던 말씀을 돌이켜봤다. 그제야 호제의 굳었던 얼굴 근육이 풀렸다.


“엄마, 이제 다음 경기 준비할래.”






이날 나는 호제가 누구를 만나건, 본인의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하기를 매 경기를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여섯 바퀴를 도는 동안, 제일 많이 얘기 나눴던 내용이다.


선생님들께 배웠던 기술을 이렇게 저렇게 써보고, 두려움을 극복하며 행위에 집중하는 경험을 쌓길 바랐다.


어떤 경험이 호제에게 쌓였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호제도 모를 수 있다.


혹여나 머리로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호제와 내가 손을 꼭 잡고 실내체육관을 돌고 또 돌며, 긴장된 마음을 녹여냈던 손의 체온과 얼굴 근육의 이완을 몸이 기억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호제 몸이 기억을 못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


내가 더 꼭! 꼭! 기억해야지. 초록이 움트는, 하양과 분홍이 물든 봄날에 손을 마주잡고 불안과 긴장을 다독이며 걸었던 근사한 순간을!


이 날 호제는 예선전 5경기 후 32강, 16강, 8강, 4강, 결승까지 총 10경기를 뛰었다. 한 단계 한 단계를 거치며, 마침내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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