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예지 May 17. 2024

반복 또 반복

지겨움과 갈고닦음의 오고 감


어제 했던 연습을 오늘 또 한다. 반복의 연속이다. 지칠 법도 한데 여전히 즐겁게 펜싱수업을 고대하는 호제다. ‘히히’의 표정으로 “내일이 펜싱 가는 날이지?”라고 확인한다.



요즘 나의 마음 한편에는 ‘호제는 펜싱에 지겨움을 느낄까? 느낀다면 그 시기는 언제일까? 지겨움을 느끼는 호제를 만나면 나는 어떤 언행을 하는 게 좋을까’가 자리 잡고 있다. 지겹다는 게 그만두고 싶다는 동의어는 아닐 테고, 반복해서 연습하는데 더 이상 나아지는 게 없는 것 같다고 느끼는 답답함일 수도 있고, 내가 짐작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을 수 있다. 나는 옆에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펜싱을 배우는 초반 무렵, 요셉 원장님이 반복 연습과 지겨움에 대한 말씀을 했다.


“아이들이 처음에는 펜싱 칼을 들고 새로운 걸 배운다는 생각에 흥미를 가져요. 그러다가 배운 동작을 반복해서 연습하면 지겨움을 느끼기도 해요.”


 


 


‘반복’이 없는 분야가 어디 있겠냐마는, 지난 몇 년간 펜싱이라는 운동을 지켜보니 그야말로 ‘반복’의 결정체다.


신생아가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과 동일하다. 아이는 걸음마를 시작하면 넘어지고, 실수하고를 반복하며 본인의 걸음걸이를 찾는다. 앞뒤로만 움직이는 펜싱도 마찬가지다. 정해진 자세를 배우지만 선수마다 본인만의 적합한 걸음걸이가 어느 순간 나온다. 리듬감마저 각자 다르다. 이 모든 것은 끊임없는 반복에서 나온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며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를 반복하며 펜싱 걸음을 익힌다. 앞으로 가는 걸음을 마르쉐(marche), 뒤로 가는 걸음을 롱뻬(rompre)라 부른다.


꼬꼬맹이부터 시작했던 호제는 꽤 오랜 시간 걸음걸이 연습을 했다. 몇 년 전 <나 혼자 산다>에 나온 오상욱 선수와 직업선수들도 여전히 운동시작 전 걸음 연습을 하고 있었다. 공격 자세인 팡트(fente)를 곁들어서. 어디까지를 기본기로 봐야 할지 모르겠지만, 호제는 마르쉐-롱뻬-팡트만 꽤나 오랜 시간 연습했다. 지금도 하고 있지만 말이다.


여기에 기술이 하나씩 얹힌다. 데가제, 옥타브, 식스, 프림.. 배운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 내 것으로 만들려면 반복이 필요하다.


 






똑같은 걸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한결 수월해진 나를 발견하는 재미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순간은 자주 찾아오지 않고, 오래가지 않는다. 익숙해지면, 과업의 난이도를 높여야 재미를 느끼고, 또다시 훌쩍 큰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또다시 반복훈련이 필요하다. 나의 능력치는 여기가 끝일까를 의심하게 되는 순간을 만나기도 할 테다.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 ‘반복’이지만, 조금만 샅샅이 톺아보면 반복이 아니다. 행동은 같을지언정 행동의 내용은 다르다. 과거의 내 몸과 현재의 내 몸은 분명 다르다. 가깝게는 어제의 몸과 오늘의 몸은 다르다. 나의 컨디션에 적합한 동작을 찾으며 색다름을 찾기도 한다.*


 




여전히 펜싱이 즐거운 호제의 모습을 관찰하면, 반복훈련 속에 있는 변주를 호제가 섬세하게 발견한다. 어제의 호제와 오늘의 호제가 달라짐을 느끼고, 뿌듯해하기도, 전능해지기도 하며, 미래의 호제를 꿈꾼다. 반대도 왕왕 일어난다. 속상함에 내일은 쉬어야겠다고 말했다가, 분함을 삭이고자 나름 부단히 노력한다. 어린 티가 한껏 묻은 영글지 않은 말로 표현한다.



“오늘 펜싱할 때 발이 이렇게 요렇게 됐단 말이야?! 그래서 발을 이렇게 했단 말이야?!...그래서 지금 아파! 아!!!! 아파!!!!!!!!!!!!”


“칼을 바꿨던 말이야. 그러니까 칼을 들었는지도 모르겠더라.”


“(빠른 마르쉐를 하며) 어때? 내 발 보여?” (빈말하기 어려워하는 나에게 이런 질문은 순간 당혹스럽다.)


“오늘 힘이 빠지고, 잘 안 됐어(침울). 나 내일 안 가! 안 갈 거야!”






뻔해 보이고, 다 아는 것 같은 반복에서 미세하게 달라지는 모양새를 관찰하며 주욱 나아가면, 어느 순간 훌쩍 큰 나를 발견하게 될 거다. 훌쩍 크지 않아도 상관없다. 옆으로 건, 아래 깊이로건, 어딘가 반복의 힘이 쌓여있을 테니까.


반복의 힘은 연령에 상관없이 프로페셔널(professional)함으로 이끌어줄 테다. 반복은 동작과 사고의 자동화를 이끌고,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어 줄 거다. 아마추어와 전문가 역시 반복의 힘에서 가려질 것이다.


호제가 느끼고 있을 벽, 혹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어딘가 답답하고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 벽을 갈고닦는 반복의 힘으로 깨뜨리는 경험을 꼭 해보길 바라본다.


호제야

“다 뿌시자!”



반복 속에서 변주를 발견하며,

즐겁게 뿌시자!!!


(부수다 보다는 뿌시자! 발음이 의지를 더욱 느낄 수 있도록 된소리를 살렸다.)


 


 


덧,

“뿌시자” 의 출처.


작년부터 Y는 새로운 장소에 가면, ‘다 뿌시고 가자!’고 차 안에서 외친다. 이를 테면, “이번에 강릉 다 뿌시고 가자!!! 이번에 전쟁기념관 다 뿌시고 가자!!!” 내 입장에서는 파괴하는 이미지가 번뜩 떠오르는 단어를 꼭 써야만 했을까 싶어 “엉?!?!?”라고 반응했다. 호제는 매우 좋아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몇 번을 반복해서 듣다 보니 최적의 발음과 문구다.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하다.


어려움을 반복해서 두드려 깨뜨리는 ‘부수다’.



*변주 (變奏)

1. 어떤 주제를 바탕으로, 선율ㆍ리듬ㆍ화성 따위를 여러 가지로 변형하여 연주함. 또는 그런 연주.

2. 어떤 주제를 바탕으로, 소재ㆍ형태ㆍ방식 따위를 변형하여 표현함. 또는 그런 표현.



참고문헌

* 요시이 마사토 지음, 김대현 번역 (2023). <가르치지 않아야 크게 자란다>. 코치그라운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