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냥이 Mar 19. 2024

아들은 아빠가 어렵다.

저녁에 집에서 아내와 밥을 먹고 있는데 핸드폰 화면에 아빠라고 뜬 전화표시가 보였다. 아빠에게 전화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제주도에 갔을 때 비행기에서 내린 후 부재중으로 뜬 아빠의 수신기록을 봤었다. 중요한 일이라면 다시 전화하겠지 싶어 회신하지 않았다.     


전화를 받으라는 아내의 말에 전화를 들고 수신 확인 버튼을 옆으로 민다.

     

“어, 아빠.”

“목소리 듣기가 힘들다.”

“아, 그렇지 뭐.”

     

내가 말했지만 뭐가 그렇다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자연스레 전화를 이어간다. 옆자리에 있는 아빠 친구와도 대화를 나눈다. 건강하시라고 인사를 드리고 아빠에게 다시 전화드린다며 통화를 마친다. 


요즘 이런 일이 잦다. 아빠 성격상 보고 싶다고까진 말하지 못하지만 이런 식으로 돌려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빠에게도 여성호르몬이 나오는 시기가 온 건가.     


문득, 제주도에 있을 때 온 아빠의 전화를 왜 다시 회신하지 않았는지 생각한다. 엄마나 아내였다면 바로 다시 걸었을 거다. 그런데 왜 아빠에게는 선뜻 전화 버튼이 눌리지 않았던 걸까. 


얼마 전에 아빠가 빌려간 500만 원이 생각이 났다. 돈을 빌릴 거라는 생각에서 피했을까. 문득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싫어진다.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다.


아마 인간적인 교류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빠에게 특별한 원한(?)이 있진 않다. 대학교 때 용돈도 주셨고 취업준비할 동안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다. 경제적으로는 지극정성이셨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아빠를 어색해하는 건 속마음을 털어놓은 순간들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가 이런 반응을 보일 때 당혹스럽다. 아내나 엄마가 이런 반응을 보였다면 이해가 됐을 것이다. 아내와 엄마와는 개인적인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들과 고민과 생각을 나누고 같이 시간을 쌓아나갔다. 하지만 아빠와 나는 이런 시간이 부재했다. 술 마시던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던 과묵한 친할아버지처럼 우리 아빠도 나에겐 그랬다.     


나이가 어렸을 때는 아빠의 이런 모습을 그려려니 했다. 원래 그런가 보다 했던 것 같다. 나 하나도 돌보기 벅찰 땐 이런 모습이 편하다고 느낀 때도 있었다. 그런데 커가면서 생각이 달라진다. 


특히나 집을 벗어나서 결혼을 하고 독립을 해서 그런가 아빠가 이제는 솔직하게 본인의 생각이나 고민들을 나눠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하지만 내 이런 마음은 욕심이다. 육십 평생 이렇게 사셨는데 달라지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아빠는 나를 사랑하고 나도 분명 아빠를 사랑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아빠는 과연 정말 그리고 할 수 있을까. 새삼 아빠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도 나를 보면서 똑같이 느낄까?   

   

얼마 전에 독서모임에서 한 분이 전역 후 아버지가 본인에게 고민을 이야기하는 순간 어른이 되었다고 느끼셨단다. 이야기를 들으며 솔직히 부러웠다. 아버지와 속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점에. 



아버지와 통화하는 내 모습에 아내는 팀장님과 통화하냐며 놀린다. 그 말에 살짝 충격을 받는다. 내가 이 정도로 아빠를 어려워했나 싶어서다. 어째 나이가 먹어갈수록 아빠가 더 어려워진다.



Image by Olya Adamovich from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은 책을 보는 가? 읽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