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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흘러가게 둬도 괜찮다.

by 도냥이

누나의 말에 귀 기울이다

일을 마치고 아내와 집에서 저녁을 먹던 중, 작은 누나에게 전화가 왔다. 식사 중이라며 양해를 구하고, 이따 다시 걸겠다고 말했다. 식사를 마친 후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누나에게 전화를 다시 걸었다. 몇 초간의 신호음 끝에 들려온 누나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목소리는 흥분한 듯 높았고, 말도 빨라졌다. 술 마셨냐고 묻기 전에 "한 잔 했어"라며 선수를 치는 누나다. 물론 '한 잔'이 아니라 '한 병'은 넘긴 듯했다. 전화기 너머로 술 취한 특유의 불콰한 기운이 전해졌다. 술 취한 사람 특유의 불콰한 분위기가 전화기 너머로 나까지 전해진다. 누나는 술에 취하면 가끔 나나 엄마에게 전화전화를 한다. 회사 대표라는 외로운 위치 때문일 것이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전화 통화는 한 시간 반 동안 이어졌다. 누나는 회사 직원이나 동거인에 대한 불만을 쉴 새 없이 쏟아냈다. 대화는 거의 누나가 말하고, 나는 중간중간 몇 마디를 던지는 방식이었다.


그러던 중, 누나가 문득 말했다. "도냥아, 너는 편하게 살아. 열심히 하든 안 하든 비슷하잖아" 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이미 술 취한 사람의 말이라 그냥 넘길 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찡했다. 예전과는 달리, 그 말이 납득이 갔다.


예전 같았으면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내 가능성은 무궁무진한데 누나가 뭔데 내 한계를 정해?" 그렇게 속으로 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서른 중반이 되었고, 결혼도 했고, 회사 생활도 5년쯤 되다 보니 그 말이 조금은 다르게 들렸다.


삶의 틀을 다시 바라보다

이제 나는 내 삶의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처럼 평생 살 거라 단정 짓지도 않는다. 인생이란 놈은 언제 어떤 폭탄을 던질지 모르니깐. 하지만 한 여자와 평생을 함께 하고, 정년이 보장된 일을 하는 이상, 큰 틀에서는 인생의 결정이 대부분 끝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아등바등 살든, 그냥 살든 큰 차이는 없지 않을까.


마음속 밧줄을 느슨히 풀다

누나의 말을 듣고 내 안에서 팽팽히 조여 있던 긴장감이 스르르 풀리는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지금까지 애써 열심히 살려고 했던 것 같다. 성실함을 중요시하던 부모님의 영향도 있었고, 그들 역시 위로부터 물려받은 태도였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놀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꼭 일자리를 연결해 주셨다고 들었다.


그 외에도 자기 계발서들의 영향도 있었다. 열심히 살아야만 삶의 통제권을 가질 수 있고, 그래야만 나를 개선할 수 있다는 믿음. 나 역시 이런 분위기에 젖어 아득바득 살아왔던 것 같다. 학교 다닐 때도, 대학 시절에도 '어떻게 하면 더 열심히 살 수 있을까'를 자주 고민했다. 결과는 신통치 않았지만 말이다. 아마 실제 행동보다는 '열심히'라는 태도 자체에 집착했던 것 같다.


살아보니 인생은 기본적으로 따분한 것 같다. 아무리 재미있는 활동도 깊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 지루함이 숨어 있다. 우리가 괴로운 건 어쩌면 인생의 이런 속성을 잘못 기대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열심히’라는 환상을 깨다

누나 말이 맞는 것 같다. 열심히 하든 안 하든 결과는 큰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질수록 결과는 더 나빴던 것 같다. 난 압박에 대한 반응이 두 가지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압박이 강해질수록 더 힘을 내는 사람이다. 롤 프로게이머 페이커처럼, 그는 결승전일수록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인다.


또 하나는 압박에 약한 사람이다. 무언가 닥치면 허둥지둥하다가 하던 일도 제대로 못 하게 되는 사람. 나는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순리대로 살아가기로 결심하다

앞으로는 '열심히' 보다는 '그냥 한다'는 태도로 살아보려 한다. 억지로 나를 다그치기보다, 이것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인지 자문하려 한다. 상황이 닥치면 자연스럽게 하게 될 것이고, 더 나은 결과물을 원하면 저절로 몰입하게 될 것이다. 굳이 먼저 '열심히'라는 말로 나를 지치게 만들 필요는 없다. 그냥, 생긴 대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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