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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챙 May 10. 2024

우리 교회에서는 내가 제일 외로웠으면 좋겠습니다

미국 대형 한인교회에서 말이에요



이 이야기는 "교회"에 대한 에세이입니다. 만약 당신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이야기는 "미국에 있는 한인 교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도 이민자가 아니라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미국 한인 대형교회에 다니는 한 30대의 이야기입니다. 그저 한 사람의, 한 교회에서의 경험일 뿐입니다. 주관적인 개인의 경험으로 모든 대형교회의 상황을 정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 교회를 비난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마음이 슬퍼서 쓰는 에세이입니다.

무슨 이야기든 양쪽의 입장을 들어봐야 합니다. 하지만 이 글은 익명으로 익명의 교회에 대해 쓰는 것이라 상대방의 입장을 듣는 것이 불가합니다. 그러니 시작부터 불공평한 글입니다.

그리고 아마 이 교회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 교회가 아닐 겁니다. 이 이야기는 어쩌면 그저 하나의 우화일지도 모릅니다.




작은 교회의 청소년


어려서부터 작은 교회에 다녔다. 작은 교회에 다니는 청소년이 큰 교회 다니는 친구를 만나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큰 교회는 작은 교회보다 해줄 수 있는 게 많다. 마치 부잣집 아이와 가난한 집 아이의 차이 같달까.


그래도 작은 교회에 다니는 청소년들에겐 자부심이 있다. 우리는 본질을 놓지 않아. 크기가 다가 아니야. 우리는 성경을 제대로 배우는 소수정예야.


하지만 마음속의 자부심도 상대적 박탈감을 없애주진 않는다. 같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왜 우리만 초라해?


작은 교회 어른들의 행동들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말로는 크기가 다가 아니라고 하면서 큰 교회처럼 되기를 바란다. 부흥을 외치는데 그 부흥이 단지 영적 부흥을 말하는 것 같지만은 않다. 






대형 교회 청년


20대에 새로운 곳으로 이주해 다닐 교회를 찾았다. 교회를 고르는 기준은 딱 하나였다. 이 동네에서 제일 큰 교회. 부흥은 하나님의 뜻이라며? 이곳에서 어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보고 말겠다.


뭐든 작정하고 시작하면 더 풍부한 경험할 수 있다. 마치 아무 생각 없이 여행을 떠나는 것과 최대한 많은 것을 담아 오려는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의 차이와 같다.


처음 들어선 대형 교회의 로비에는 사람이 많았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은 외롭다. 하지만 괜찮다. 여기도 어차피 예수님의 교회니까.


하지만 교회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자기들끼리 웃고 떠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꽤나 외로울 것 같았다. 로비를 지나 예배당 입구까지 가는 길이 꽤나 멀게 느껴질 거다.

 

내가 대형 교회에서 몸담은 곳은 20-30대 젊은이들이 모여있는 한어권 청년부였다. 미국에서 한국어가 편한 청년들은 소수지만 대형교회라 한어권 청년부에도 웬만한 작은 교회만큼의 사람이 있었다.


새신자 과정을 수료하고 교회에 정식으로 등록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헌금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하지만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교회 프로그램을 이수했다. 나중에 리더가 된 후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애가 새벽예배도 나오고 웬만한 프로그램은 다 들어서 처음엔 이단인 줄 알았다고.






사람이 많은 교회는 다 이유가 있다


각 대형 교회마다 특징이 있겠지만, 내가 다니는 교회는 차세대 교육에 집중했다.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휘황찬란한 여름성경학교, 유아부터 고등학생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모임과 프로그램들. 그리고 아이들을 프로그램에 보낸 후 부모들이 참석할 수 있는 완벽한 스케줄의 어른 프로그램까지. 여긴 아이 키우는 이민자들이 다니기에 최적화된 교회였다.


하지만 한 곳에 선택과 집중을 하면 소외받는 곳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소외받는 이들 중엔 내가 속한 한어권 청년들도 포함됐다. 하여간 난 대형교회에 가서도 하필 소수집단을 골랐다.






대형 교회 안의 고아들


리더가 되고 나니 교회 어른들을 알게 되고 교회 돌아가는 사정이 눈에 들어왔다. 교회의 비전, 주요 사역의 방향, 교인들의 시간과 돈의 흐름으로 파악되는 교회가 지향하는 것들. 내가 속한 한어권 청년들은 교회가 지향하는 방향에 없었다.


미국에서 한국어가 유창한 청년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한국에서 온 유학생, 취직해서 이사 온 사회초년생, 영어보다 한국어가 더 편한 늦게 이민온 청년. 이들의 공통점은? 부모님이 이 교회에 다니지 않거나, 돈이 많지 않다는 것. 영어보다 한국어가 편한 사람들이니 미국 사회에서 주류에 속하기가 비교적 어렵다.


안타깝지만 공교롭게도 이들의 공통점과 교회의 무관심이 맞물렸다. 교회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은 그런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소외받는다는 생각이 들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지금 이 교회에 우리 부모님 없다고 우리 이렇게 푸대접하는 거 아니야? 지금 교회가 제일 공을 들이는 게 영어권 교육인데, 거기 있는 애들은 다 교회 장로님 권사님 아들·딸이나 손자·손녀더라?


청년부 담당 부목사님은 자주 바뀌었고, 어차피 청년부는 교회에서 지원을 많이 못 받는 곳이기에 담당 목사님의 마음은 항상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가뜩이나 푸대접받는 소수인데 리더까지 우리의 필요를 몰라주니 서러움은 쌓여갔다.






고아들도 결국엔 부모가 된다


한어권 청년들도 나이가 먹으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내가 영어를 아무리 못해도 미국에서 낳을 아이는 영어권이고, 그러면 내 아이를 보낼 수 있는 교회 프로그램을 찾게 된다. 마치 그동안 한어권 청년이던 나를 푸대접하던 교회가 내게 속삭이는 것만 같다. 그거 봐, 우리 교회 프로그램 괜찮지? 그동안 돈 잘 쓴 거 맞지? 사람은 서러웠던 시간이 지나가면, 과거의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해있는 현재 서러운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는다.


하지만 어딜 가나 집단의 방향에 항의하는 눈에 가시 같은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교회에서 문제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떠나라고. 그게 네 영적 건강을 위해서도 좋다고. 하지만 누구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개신교는 원래 항의하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인데.


결혼 적령기의 나이 든 청년들과 결혼한 몇몇 선배들이 교회에 항의를 시작했다. 이거 좀 아니지 않아요? 청년들에게 관심 좀 가져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다음 세대가 중요하다면서요? 교회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들 자식·손주 아니면 다음 세대도 아니에요? 그래, 우리는 이제 결혼하고 먹고살만해져서 괜찮다 쳐요. 우리는 이제 청년부 떠나서 당신들이 속한 집단에 합류하면 돼요. 그래도 돈 없고 미국에 부모 없는 우리 후배들은 교회가 좀 신경 써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결국 청년들을 달래기 위해 교회의 2인자 부목사님이 청년들 앞에 섰다. 자자, 청년 여러분, 교회의 의도는 그게 아니라.


청년들이 목사님에게 물었다. 한어권 청년들은 교회의 안중에 없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의도치 않았겠지만 결국 이 말을 내뱉고 말았다. 교회의 지원을 더 바란다면 여러분이 헌금을 더 하시면 됩니다.


물론 교회의 마음은 천국에 있겠지만 교회 건물은 세상에 존재한다. 건물을 유지하고 거기에 사람들이 모여 활동을 하려면 돈이 든다. 더 챙겨주고 싶어도 돈이 없으면 그럴 수가 없다. 하지만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말에서 그 마음이 전해지지 않을까?






돈 없으면 위축되는 교회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사람들이 모인 곳엔 그들만의 문화가 형성된다.


내가 다니는 대형교회 주차장에 들어서면 좋은 차들이 쉽게 눈에 띈다. BMW, 벤츠, 포르셰, 테슬라, 기타 등등. 물론 평범한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비싼 차에서 내리는 비싼 옷을 걸친 사람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돈 잘 버는 직업을 가진 사람도 꽤나 많다. 큰 사업을 하는 사람,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 그냥 돈이 많은 사람.


간혹 힘든 경험을 한 사람이 간증을 한다. 믿었던 직장에서 실직을 당했다. 자존감이 무너졌고, 삶이 어려워졌다. 하지만 하나님께 의지하니 회복되었다. 할렐루야.


그런데 그들의 간증은 뭔가 의아하다. 실직을 당했어도 살고 있던 큰 집은 유지가 된 것 같다. 누구는 실직당하면 길거리인데, 누구는 실직하면 시간이 남으니 길거리로 산책을 나간다. 부자는 실직을 당해도 다음 직장을 찾을 때까지 품위 유지가 가능하다.


한 젊은 부부가 교회에 왔다. 사람이 그리워서 왔지만 교회 모임에 나가면 식사비가 든다. 한 끼에 인당 20달러, 커피는 5달러. 누구에겐 아무것도 아니지만 누구에겐 이번 달 전기세가 생각나게 만드는 돈이다. 가끔 젊은 부부들의 모임에 초대받는다. 새로 지은 누군가의 집에 모여 자녀 학군이야기를 나눈다. 학군이 좋은 동네는 비싸다. 하지만 그런 동네는 누군가에겐 천국보다 먼 세상이다.






교회에서는 나 같은 사람이 제일 외로웠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에서 나 같은 사람은 안 챙겨줘도 괜찮다. 챙겨주면 오히려 귀찮아한다. 안 챙겨줘도 알아서 예배드리고, 헌금도 하고, 목사님이 예배시간에 성경과는 동 떨어진 궤변을 늘어놓으면 스스로 성경을 찾아보며 마음을 정화하고, 쫓아다니며 봉사하라고 안 해도 어딘가에서 봉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자존감이 높아서 교회에서 푸대접을 받으면 섭섭하긴 해도 서럽진 않다. 교회가 이상한 결정을 하면 이렇게 분노한다: 야이씨, 이게 니들 교회냐, 예수님의 교회지.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았을 거라고, 외모와 돈으로 판단받지 않을 거라 기대한다. 하지만 좋은 집에서 화기애애 모임을 갖는 사람들을 보며 스스로를 판단하게 된다. 위로받으려고 나간 교회 모임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예수님은 공중의 새도 둥지가 있건만 본인은 누울 곳조차 없다고 하신 것 같은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겐 아주 크고 좋은 둥지가 있다.


기쁘고 싶어 교회에 갔는데, 교회는 이미 삶이 기쁜 사람들만 갈 수 있는 곳 같다. 교회에 오니 더 기쁘지 않아 진다. 


교회에선 나처럼 예수님을 오래 알았던 사람이 제일 외롭고, 지치고 힘들어서 교회를 찾은 사람이 제일 기뻤으면 좋겠다. 교회 오래 다닌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 위로를 받은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니 교회에서 친한 사람끼리 자기 사람만 챙겨주며 위로하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은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을 본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을 얼마나 닮았나. 힘들어 교회에 왔던 사람들이 나를 보고 더 외롭진 않을까. 지금 내가 잊고 있는 소외당한 사람이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속한 교회를 보고 뭐라고 하실까. 그리고 나는 우리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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