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순은 다시 돋아날 거야
봄은 언제나 설렘이었다. 긴 겨울을 지나며 얼어붙었던 뿌리가 녹고, 가지 끝마다 새싹이 움트기 시작하는 계절. 나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새 생명을 맞이할 준비로 분주했고, 곧 찾아올 햇살과 꽃비를 떠올리며 서로 눈빛을 나눴다.
"느티"는 도시 변두리에서 숲의 입구를 지키듯 서 있었고, 봄바람에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잎이 트는 것을 느끼며 고요히 웃음을 지었다.
"벚아"는 며칠 전부터 봉오리를 부풀리고 있었고, “이번 봄엔 좀 더 환하게 피어야지”라며 가지를 가볍게 흔들었다. "은비"는 낙엽 없이 말간 몸으로 햇살을 기다리며 뿌리를 차분히 가다듬었다. "소나"와 "밤이"는 숲 깊은 곳에서 서로 겨울 이야기와 봄에 새로 돋을 초록빛 계획을 나누며 조용한 설렘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평화는 봄을 맞기 위한 준비의 끝자락에서,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완전히 무너졌다.
그날은 맑은 하늘이었다. 성묘를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가던 중, 한 남성의 담배꽁초 하나가 산 아래 마른 낙엽 속으로 떨어졌다. 처음엔 아무 일도 없는 듯했지만, 금세 연기가 피어올랐고 바람은 거침없이 그 불씨를 숲 속 깊은 곳으로 퍼뜨렸다.
"형님… 연기 냄새가 나요!" 벚아가 깜짝 놀란 듯 소리쳤다.
느티는 이미 짙은 매캐한 연기를 느끼고 있었다. "이런… 숲 쪽에서… 불이 난 것 같구나. 바람이 이쪽으로도 불어오고 있어."
소나와 밤이는 연기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숲 한쪽이 붉은 연기로 뒤덮이고 있었고, 소나는 자신의 바늘잎 끝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밤아, 저기 봐. 우리 친구들이 있던 곳이야… 이대로라면 다…" 소나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밤이는 땅속 깊은 곳에서 전해져 오는 수분의 흐름이 혼란스러워지는 걸 느꼈다. "저쪽 뿌리들… 타버리고 있어. 물이 끊긴 것 같아…"
불은 멈추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째. 헬기가 오고, 소방차가 산 아래까지 접근했지만 산세는 험했고 바람은 계속 방향을 바꿨다. 나무들은 그 자리에서 피할 수도, 도울 수도 없었다.
"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까…" 은비는 처음으로 속으로 흐느끼듯 속삭였다.
"그게… 우리의 존재이기도 해." 느티는 침착하려 애쓰며 말했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아도, 늘 자리를 지키는 존재야. 하지만 그 자리가 무너질 때의 무력함은… 정말 참기 어렵구나."
벚아는 불길이 직접 닿지 않았지만, 그을음과 뜨거운 바람으로 봉오리들이 타들어갔다. 그의 봄은 오기 전에 끝이 난 셈이었다.
"형님, 제 꽃들… 다 시들어버렸어요. 이렇게 된 이상 올해는 아무것도 보여줄 수 없을 것 같아요."
벚아는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 의미가 사라진 듯한 허탈감을 느꼈다.
느티는 그런 벚아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벚아야, 네가 꽃을 못 피워도 사람들은 널 기억할 거야. 다음 해, 더 강해진 모습으로 다시 꽃을 피우면 돼. 그게 우리의 순환이잖니."
불이 번지지 않은 가장자리에 가까웠던 밤이는 가까운 나무들에게 연기를 피할 수 있는 습지 방향을 안내하기 위해 뿌리의 울림으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자리에 있지만, 뿌리로라도 전할 수 있다면… 살아남은 친구들이 그곳으로 향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
소나는 그 신호를 따라 외곽 쪽 어린 묘목들에게 속삭였다. “저쪽으로 가면 물이 있어. 버텨야 해.”
이 작고 보이지 않는 움직임은 많은 묘목들을 불길로부터 지켜냈고, 불길이 꺼진 후 남겨진 일부 생명의 기반이 되었다.
불은 결국 진화되었지만, 나무들이 기억해야 할 봄은 온전히 사라져 있었다. 봄은 다시 올 테지만, 올해의 봄은 ‘잃어버린 계절’로 나무들의 마음속에 남게 될 것이었다.
느티는 검게 그을린 숲을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우리는 그 자리에 서 있었기에, 타오르는 불을 온몸으로 겪었다. 그래도 다시 싹을 틔울 것이다. 우리는 나무니까. 다시, 시작해야 하니까.”
소나는 그 옆에서 나직이 대답했다.
“잿빛 봄바람이 불어도, 결국 그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다시 새순은 돋아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