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1994년
오만 촉광 아래 빛나던 소위 계급장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반짝임은 땀과 의심, 참음과 충격 위에 얹어진 것이었다. 그 시절, 우리는 뜨거운 여름 한복판에서 불안한 현실과 맞붙고 있었다.
1994년, 나라 전체가 들썩이던 해였다. 입대 직전, 북한은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했고, 임관 후 초등군사반교육(OBC) 입교하자마자 김일성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전쟁이 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은 극도로 가중되었고 막연한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훈련 일정을 단축하고 바로 전방에 투입될 수 있다는 실질적 긴장감으로 다가왔다.
그 시기, 초급 장교 양성 교육은 훈련이 아니라 검증에 가까웠다. 과연 이 사람을 믿고 부하를 맡길 수 있는가. 책임은 무겁고, 판단할 시간은 부족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압박이었다. 사격보다 상황판단, 구보보다 눈치. 우리는 군사학보다 조직의 생리를 먼저 배웠다.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군 내부에서 터졌다. 육사 50기, 학군 32기. 동기지만 몇 달 먼저 임관한 장교들이 신임 장교를 ‘길들인다’는 이름으로 가한 병사들의 하극상 사건, 그에 반발한 장교들의 무장탈영 사건. 그 사건은 내게 군대라는 시스템이 품고 있던 오래된 곰팡이 냄새를 들이마시게 했다.
‘군대는 계급으로 움직이는 곳이지만, 사람은 존중으로 움직인다.’
그 단순한 진리를 조직은 자주 잊었다. 하극상이라는 말로 묻히기엔, 그건 부조리의 폭발이었다. 쌍팔년도 방식의 강압과 서열문화는 실전에서 가장 중요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함정이었다. 나는 그 사건 이후로, 계급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바로 스스로에 대한 의지였다.
그해 여름, 유난히도 더웠다. 수십 년 만에 찾아온 기록적인 폭염. 기온이 아니라 조직의 공기가 숨 막혔다. 뜨겁고 무거운 날들 속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내가 선택한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구의 강요도 아니고, 조건도 아니었다. 내가 스스로 '이 길을 간다'라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의지가 나를 붙잡았다. 그것이 없었다면 얼차려 속에서, 혹은 자괴감 속에서 나는 일찌감치 무너졌을 것이다. 아내와 돌도 안된 딸과 떨어져 있었고, 내 꿈도 아직 불투명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내가 지금 여길 버티지 못하면 앞으로의 누구도 책임질 수 없다는 것.
임관 후, 그 당시 함께 훈련받던 동기 중 몇은 지금 투스타 장군이 되어 전방 사단장으로 성장했다. 그들의 계급과 역할을 보며 나는 가끔 생각한다. 그들이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할까. 우리 모두가 뜨거웠던 이유는, 출세가 아니라 ‘장교가 된다는 것’의 무게를 정말로 믿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
지금 돌아보면, 계급은 누구나 달 수 있다. 하지만 책임은 아무나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책임을 짊어질 자격은 훈련소가 아니라 그 사람의 결정, 그 사람의 ‘결심’에서 시작된다.
나는 빛나는 계급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밤에 달빛에 반사되지 않도록 감춰야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도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 계급장이 은은히 빛난다. 그건 반짝임이 아니라 그 시절, 나 자신을 선택했던 순간의 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