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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한 아버지, 시작의 무게

장교의 길목에서

by 서담


'94년 1월 26일 딸아이가 세상에 온 지 73일. 나는 아버지가 되었고, 동시에 입영통지서를 들고 있었다. 장교가 되기 위한 첫걸음, 육군 3 사관학교 장교양성훈련과정에 입대하던 날, 나는 이미 가족을 가진 가장이었다. 그날 아침, 아내는 내 손을 붙잡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웃었고, 갓난 딸은 잠든 채로 있었다.


사랑해서 결혼했고, 사랑해서 아이를 낳았지만 남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아내에게 떠넘겼던 게 아닐까 싶었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들을 뒤로한 채 나는 스스로의 미래를 위해 입영열차에 올랐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것이 ‘국방’이라는 이름의 사명감 때문이라며 자기 위안을 반복하고 있었다.


아내는 단 한마디의 원망도 하지 않았다. 곧바로 시골 시댁살이를 시작했고, 생후 겨우 두 달 된 딸아이를 혼자 돌봤다. 나는 그런 아내를 ‘의연하다’고 표현하고 싶었지만, 사실 그 의연함은 ‘버팀’이었다. 혼자서 감당해야 했던 불편, 고독, 그리고 말 못 할 감정의 덩어리들을 아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감추고 있었다.


육군 3 사관학교에 입소한 뒤, 본격적인 장교양성훈련이 시작됐다. 임관까지 약 3개월. 그 시작은 ‘가입교 기간’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졌고, 그 몇 날 며칠은 상상 이상의 강도로 우리를 조여왔다.


단독군장을 반복하며 환복을 수없이 반복하고, 정신적 긴장과 체력적 피로가 한계에 이르는 지점까지 몰아붙이는 훈련 속에서 나는 ‘생각’이라는 걸 허락받지 못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시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어떤 판단도 의미 없었고, 판단을 하는 순간, 곧 ‘이탈’로 간주되었다.


군인의 삶은 그 첫걸음부터 ‘개인’이 아닌 ‘조직의 부품’으로 정렬되는 감각이다. 나는 그 속에서 아버지라는 이름도, 남편이라는 정체성도 순간순간 희미해지는 걸 느꼈다. 단지 하나, 눈을 감을 때마다 떠오르던 두 얼굴이 있었다. 아내와 딸. 그 둘은 내가 인간으로 남아 있으려 애쓴 마지막 끈이었고, 장교로 임관하겠다는 결심의 유일한 불씨였다.


훈련과 동시에 내려진 금연지시, 어느 날 밤 스트레스가 임계점을 넘어섰을 때 나는 몰래 담배를 피우다 적발되었다. 그 순간, 내 안의 도덕성과 자존감은 부끄러움에 휩싸였다. 규율은 군대의 기본이고, 나는 그 질서를 어긴 것이다. 나 자신에게 가장 실망했던 순간이었다.


군대에서는 작은 일탈조차 개인의 신념을 시험하는 도구가 된다. 그 얼차려는 단순한 체벌이 아니었다. ‘너는 리더로서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담고 있었다. 나는 그 질문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진정한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행동하는 것이다.” – 넬슨 만델라


그날 이후, 나는 ‘인내’를 다시 배웠다. 장교는 용맹 이전에 절제와 통제가 필요한 자리였고, 나는 그것을 몸으로 겪으며 배워갔다.


시간은 흘러갔다. 눈을 감으면 딸의 얼굴이 떠올랐고, 귀를 닫으면 아내의 웃음이 맴돌았다.

그 두 존재가 내게 요구한 것은 성공이 아니라, 책임감이었다. 나는 그것을 몰랐고, 입대 이후에야 비로소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끝이 어딘지 모를 막연함 속에서 훈련보다 더 무거웠던 건 가족에게 돌아가야 할 책임감의 무게였다. 군복의 무게는 계급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 싸우는가’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조금 알게 되었다.


돌아보면, 입대한 날 나는 ‘희망’보다는 ‘회피’에 가까운 선택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선택에 책임을 입히는 방식으로 나는 장교가 되어갔다.


가족을 두고 떠난 군인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총과 포성이 아니라, 스스로의 회피를 합리화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그때, 다짐했다. 언젠가 딸이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어?”라고 물을 때, 비록 완벽하지는 않아도, 책임을 끝까지 진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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