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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탈영장교가 되다

책임이란?

by 서담

군대는 원칙을 먹고 산다. 한 치의 융통성도 허용되지 않는 ‘규정’이라는 틀 속에서 모든 행동은 보고되고, 기록되며, 사후조치된다. 하지만 사랑은 보고로 되지 않고, 감정은 결재로 통제되지 않는다.


1995년 3월, 나는 남양주 덕정에 위치한 기갑여단 기계화보병대대 소속 초급장교였다. 하사관(현재 부사관) 아파트 배정을 받고 드디어 1년 만에 아내와 토끼 같은 딸을 상봉하게 되었다. 그날만큼은 복무규정, 지휘계통, 행정절차 모든 것이 희미한 배경으로 밀려났다.


부대 일직사령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나는 일직대기용 지프차를 1시간 정도만 쓰겠다는 허락을 받았다. “딱 1시간이면 됩니다.” 그 말엔 내 마음속 다급함과 기쁨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


아내는 딸아이와 시골에서 올라오는 길이었고, 의정부역에 도착 후 내가 배웅을 가야 했다. 지프차를 운전한 건 전담 운전병이었고, 그는 출발 전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위님, 의정부는 위수지역 밖입니다. 특별운행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나의 대답은 단호했다. “걱정 마. 내가 책임질게.” ‘소위’라는 계급, 장교라는 자부심 그리고 ‘지금만큼은 내가 결정권자’라는 착각이 그 경계를 넘게 만들었다.


우리는 주내검문소에 도착했고, 헌병이 차량을 멈췄다. “소속, 계급, 직책, 운행목적을 말씀하십시오.” 나는 신분증도 내밀지 않은 채 정면을 응시하며 말했다.


“육군장교 소위 황OO. 아파트 물품 준비차 외출한다.”


헛기침 하나 섞지 않은 그 ‘당당함’이, 얼마나 미숙하고 위험한 선택이었는지를 알게 된 건 불과 두 시간 뒤의 일이었다.


생활용품을 사고, 의정부역으로 향했다. 아내와 딸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말없이 안아주던 그 순간, 나는 세상 그 어떤 규정도 중요하지 않았다. 아내를 픽업 후 곧장 우리가 살 아파트로 이동했다. 그저 가족이 함께 있는 이 작은 공간이 전부였다.


그러나 부대로 복귀하던 길, 위병소를 지나면서 분위기가 이상했다. 대대사열대 앞에 전 간부들이 집결해 있었다. 그 정적 속에서, 대대장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황소위, 잘 돌아왔다. 간부들은 해산!”


알고 보니, 내 차량이 주내검문소를 지나자마자 헌병 측에서 위수지역 이탈(=탈영) 보고를 했고, 그 즉시 대대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어 전 간부 소집령이 떨어진 것이다. 나는 장교로서 ‘탈영 간부’로 분류되었고, 당일 대대 일직사령에게 평생 들어도 모자랄 욕을 한 번에 다 받았다.


“너 같은 게 장교야? 뭐 이런 돌아이 같은 놈이 다 있어?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아주 군대가 개판이구만?”


그날 밤, 나는 운전병과 함께 완전군장을 메고 연병장을 밤 10시까지 4시간 정도를 끝도 없이 돌았다. 고통스럽지 않았냐고? 아니다. 오히려 땀이 뚝뚝 떨어지는 그 시간 동안 내 머릿속엔 오직 한 생각뿐이었다.


“지금쯤 아내와 딸은 침대에서 잘 자고 있겠지.”


사관후보생으로 훈련받던 시절, 지휘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장교란, 책임을 모르는 자유가 아닌 책임을 아는 선택의 사람이다.” 그날 나는 규정을 몰라서가 아니라, 감정을 이기지 못해 규정을 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리더십은 실수 후의 자세로 완성되는 것이라는 것을.


운전병에게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내 잘못된 판단으로 고생한 사람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말했다. “소위님, 그래도... 가족 만나신 거 축하드립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단순히 ‘특이한 장교’가 아니라, 실패를 숨기지 않는 장교, 책임에서 도망치지 않는 장교로 남고 싶었다.


“용기란 항상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것을 넘을 각오도 하는 것이다. 다만 책임을 피하지 않을 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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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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