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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새벽, 조용한 나의 책상 앞에서

주말 시작

by 서담

천둥소리에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아직 동이 트기도 전. 익숙한 어둠 속에 낯선 소리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창밖에서는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가 리듬을 만든다. 그 소리에 등을 기대듯 다시 눕기엔, 이미 잠은 달아나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한다. 불은 켜지 않는다. 대신 책상 위 작은 스탠드에 손을 뻗는다. 부드럽고 좁은 빛이 책상 한켠을 감싼다. 이 작은 불빛 아래, 나는 나만의 시간에 들어선다. 고요하고 따뜻한, 그 어떤 간섭도 없는 새벽의 공간.


휴대폰은 진작 무음으로 해두었고, 알림도 꺼둔 채 멀찍이 밀어두었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혼자라는 사실이 정겹고 편하다. 세상과 나 사이의 거리가 멀수록, 내 마음과 나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지는 듯하다.


책상 위에는 며칠 전 인쇄해 둔 원고가 수북이 쌓여 있다. 내가 썼고, 내가 고치고 있는 글들. 아직 마무리되지 못한 문장들 사이를 펜 끝으로 더듬는다. 빨간 펜으로 줄을 긋고, 말을 다듬고, 때론 통째로 지운다. 몇 번이고 고치면서도 속은 시원하다. 지우는 일조차 이 시간엔 기꺼이 할 수 있다.


글을 쓴다는 건, 결국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바쁜 하루엔 들여다볼 여유조차 없던 나 자신을, 이 고요한 새벽에야 비로소 만나게 된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매일의 삶 속에서 나도 모르게 지나쳤던 감정과 생각들이 고스란히 이 원고 속에 묻혀 있다는 걸.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린다. 창밖 나무 잎 위로 물방울이 부서지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린다. 가끔은 천둥이 으르렁거리며 이 적막을 흔들기도 하지만, 그조차 반갑다. 사람의 말소리 대신 자연의 소음이 내 곁을 지켜주는 새벽, 나는 조금 더 나다운 마음으로 글을 써 내려간다.


책장을 넘기다 말고 고개를 든다. 책상 너머로 보이는 거실의 어둠, 그 속에서 식물들이 조용히 숨 쉬고 있다. 낮에는 보지 못했던 풍경이다. 그리고 그 옆, 찻잔 하나. 따뜻한 물 한 잔을 들이켜니, 적막이 입 안에서도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다.


글을 쓰는 동안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누구도 재촉하지 않고, 어디에도 도달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자유로움 속에서 단어들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어딘가 부족해 보였던 문장에도 어느새 온기가 들어선다. 새벽의 고요함이 빚어낸 작은 기적이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글을 쓰는 이 시간이 나에겐 하루의 시작이다. 밝은 아침보다 더 맑고, 북적이는 낮보다 더 풍성한 새벽. 이 시간이 있기에 나는 다시 또 하루를 살아낼 수 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나를 회복하고, 새로이 다듬는다.


아마 이 글도 그렇게 한 새벽의 조각일 것이다. 언젠가 누군가의 마음에 닿게 된다면 좋겠지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다. 나의 이야기를 스스로 써 내려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자체로 가치 있고, 소중한 시간이었으니.


오늘도 빗소리를 배경 삼아 조용히 책상 앞에 앉는다. 스탠드 불빛 아래, 나의 마음도 천천히 깨어난다. 그리고 다시 문장을 쓴다. 어쩌면 이 순간을 담은 또 하나의 문장을, 천천히.


한 줄 생각 : 작은 불빛 아래, 조용히 살아나는 마음 하나. 그게 내 새벽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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