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채우는 시간
주말이 시작되었다. 늘 다짐한다. 이번엔 늦잠을 푹 자보자고. 그런데도 이상하게, 주말 아침이면 꼭 이른 시간에 눈이 떠진다. 억지로 다시 잠을 청해보려 해도, 어느새 머리는 깨어 있고, 몸은 은근한 기분 좋은 이완 속에 있다. 더 자야 할 이유도, 억지로 일어나야 할 이유도 없는, 그 절묘한 무력감 속에서 나는 조용히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은 유독 비가 내린다. 밤새 창문 너머 들려오던 빗소리는 잠결에도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 차분하게 내려앉은 그 소리에 포근함을 느꼈다. 주말 아침에 어울리는 건 햇살만이 아니다. 가끔은 이런 빗소리가 더 감미롭다. 무언가를 강제로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빗소리 덕분에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나는 오늘, 무엇보다 정서적인 휴식이 필요하다는 걸 안다. 몸도 쉬어야겠지만, 마음이 먼저 누워야 한다. 평일의 시간은 늘 각이 져 있다. 일정에 맞춰야 하고,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고, 말은 줄이고 속도는 높여야 한다. 하지만 주말의 시간은 그렇지 않다. 주말의 시간은 나의 것이고, 마음대로 느려져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작은 스탠드를 켜고, 책상에 앉는다. 독서 목록에 넣어두고 미뤄뒀던 책을 꺼낸다. 빗소리를 배경음 삼아 페이지를 넘긴다. 어쩌면 이보다 완벽한 조합은 없을지도 모른다. 잔잔한 우중의 기운과 책 속 문장이 만나면, 마음속에도 작은 잎사귀들이 자라나는 것 같다. 활자가 마음 안쪽을 쓰다듬는다. 그리고 나는 느낀다. 이것이 바로 나를 위한 시간, 나를 돌보는 방식.
중간중간 넷플릭스를 켜고 요즘 가장 핫하다는 미니시리즈도 본다. 몰입도 높은 전개, 세련된 연출, 캐릭터들의 대사 하나하나가 주는 짜릿한 감정이 있다.
“아, 이건 그냥 소모가 아니라 충전이구나.”
좋은 이야기를 본다는 건,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 세계에 잠시 머물다 오면, 현실도 조금 덜 지루해진다. 덜 건조해진다.
가끔은 노트북을 펼쳐 글을 쓴다. 오늘처럼 감정이 느슨하게 풀어진 날엔, 손끝이 말보다 앞선다. 생각보다 감정이 먼저 흘러나오고, 문장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정해진 주제 없이, 쓰고 싶은 것을 쓰고, 기억나는 장면을 꺼내 적는다. 요즘은 글이 나를 돌아보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한다. 쓸수록 나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어쩌면 주말이란, 바로 그런 거울 앞에 오래 머물 수 있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시간은, 아내와 함께 나누는 식사다. 꼭 근사할 필요는 없다. 식탁 위에 놓인 따끈한 국 한 그릇,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하며 나누는 사소한 이야기들.
“요즘 당신 글, 왜 이렇게 감성적이야?”
“당신이 요즘 부드럽게 말해서 그런가 봐.”
이런 대화가 오갈 수 있는 여유, 그것이 주말의 진짜 선물이다.
함께 산책을 나가지 않아도, 꼭 어디를 가지 않아도, 집 안에서 나누는 이런 고요한 공감이 주말을 더욱 감성적으로 채워준다. 바깥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나는 여전히 이 평화로운 공간 안에 있다.
어쩌면 주말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의미는 ‘다시 나를 만나는 시간’ 아닐까. 일주일 동안 잊고 지냈던 나의 감정, 나의 호흡, 나의 속도. 평일에는 어쩔 수 없이 뒷전으로 밀려난 ‘나와의 관계’를 다시 정비할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을 통해 나는 다시 균형을 잡고, 새로운 한 주를 살아갈 준비를 한다.
빗소리가 점점 잦아든다. 창밖에 젖은 나뭇잎들이 바람결에 흔들린다. 커피 한 잔을 내려놓고 다시 책을 펼친다. 어느새 또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나를 채워가는 시간이다.
비 오는 주말은 그래서 더 좋다. 모든 속도에서 벗어나,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그 단 하나의 시간. 이렇게 충만하게 휴식을 누리는 일이야말로, 삶을 사랑하는 방식 중 하나 아닐까.
한 줄 생각 : 쉼이란,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시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