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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 그 기억은 내 것이었을까 (1)

가장 처음 기억

by 밝고바른

2024년의 어느 날, 분명 여느 때와 같은 내용으로 상담을 끝내던 중이었다. 단정한 인상의 그는 갑자기 무엇인가 떠올랐다는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곤 안경을 집게손가락으로 살짝 들어 올리고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퍽 간결한 태도로 나에게 질문을 건넸다.

"당신의 가장 처음 기억은 무엇인가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그에게 되물어야 했다. 그가 전보다 약간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해서인지 처음엔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가장 처음의 기억이라니. 무의식 속에 잔상처럼 어렴풋이 남아 있는 기억을 끄집어내라는 걸까. 예를 들면 엄마 품속에서의 기억이라던가.

당황스러웠지만 평소에도 자랑스럽게 아주 어릴 적부터 기억이 있다고 말하고 다녔던 탓에 그나마 명료하게 기억나는 순간 중 하나를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방금 전의 질문으로 늘어난 상담 시간을 채워야 했으므로 나는 짧게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처음의 기억은 아마 서너 살쯤이다.


지금은 허물어 없어진 할머니의 옛집은 슬레이트 지붕의 돌집이었다.

어딘가 무엇에 걸리기라도 한 건지 잘 열리지 않아 시끄럽기만 한 문을 힘겹게 옆으로 밀어 열면 마치 거실 같은 작은 공간이 있었고, 그 왼편에는 구들방이 있었다. 모두의 안방이었던 그 방에는 항상 두껍고 보드라운 빨간색 이불이 깔려 있던 것이 기억난다. 방 중앙에는 채널을 돌릴 때마다 드르륵 소리가 나는, 안테나가 달린 텔레비전이 있었고 그 너머 창문에는 커튼이 대충 고정되어 걸려있었다.

아빠는 그 시대에 다른 집처럼 형제가 많았는데 큰아버지 댁에만도 사촌 언니가 네 명이었으니 나와 내 동생 밑으로 사촌 동생들이 태어나기 전이었지만 좁은 방 한 칸에 모두 모이기엔 사람이 많았다. 특히나 할아버지가 오랜만에 제주에 오신 날이면 얼른 달려가 안기고 손에 들린 종합 선물 세트 과자를 건네받았다(우리의 큰 관심사 중 하나였다). 빠짐없이 모두 모인 우리 가족은 자주 그 방에 서로 가까이 모여 앉아 즐겁게 떠들며 밤늦게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처음 기억은 바로 그곳에서였다. 내 머릿속 그 공간의 시간 선에서 가장 앞에 있는 그날은 덥고, 좁고, 숨이 찼다.

사촌들은 당시 유행하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고 나는 참견하듯 계속 끼어들어 그들을 따라 하고 춤을 추다가 밀쳐지고 넘어지기도 했다. 방에서 가장 서늘한 창가 바로 앞을 부대 삼아 멋진 공연을 펼쳤다. 주목받는 일이 참 즐거웠다. 어른들의 응원을 받으며 소리를 한껏 지르고 몸을 흔들던 나는 곧 지치고 배고파져서 엄마가 데워 온 우유가 담긴 젖병을 들고 할머니께 안겼다. 이미 깊은 밤, 집에 가지 않고 여기서 모두와 계속 이렇게 놀고 싶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처음 기억이다. 떠올리고 보니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헛헛해졌다. 아주 오래된 기억인 만큼 그동안 자주 보지 못할 이유는 더해져만 갔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던 예전이 그리워지고 떠들썩하게 여러 사람과 만나 대화하는 일은 자꾸만 갈수록 없어지기만 한다. 나는 말을 마치고 짧은 정적을 가졌다. 질문의 이유를 기대하며 그를 보았다. 곧 그는 기다렸다는 듯 정해진 할 말을 무심히 꺼냈다.

"그럼, 두 번째 기억은 무엇인가요?"


맙소사, 두 번째 기억이라니!

그는 처음 질문을 했을 때보다 미묘하게 더 올라간 입꼬리로 나의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곤란한 질문을 하고서 상대방의 반응을 관찰하려는 걸까. 내 앞에 놓인 음양각의 멋들어진 원목 책상에 흰 가운을 입고 앉아 있는 사람이 사실은 외계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잠시 들었다.

대체 누가 두 번째 기억 같은 걸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살짝 찡그린 나의 표정을 읽었는지 정확하지 않아도 되니 떠오르는 대로 말해보라고 했다. 나 참, 모든 기억마다 시간이 표식처럼 달려있다면 대뇌의 폴더를 열어 시간순으로 정렬해서 해당 파일을 열었겠지만, 당최 그럴 순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뭐 하는 수 없이 떠오르는 상황과 사물을 유추해서 기억을 한 개 꺼내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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