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산책 Oct 15. 2020

프랑스 엄마처럼?
프랑스 교육은 ‘감정 억압학습’이다


 학교에 아이를 데리러 간 날이었다. 교문 앞에는 5살 정도 되보이는 아이들이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한 아이의 엄마가 도착했고 아이는 엄마와 이야기 중인 선생님께 질문을 했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잖아. 안 보이니? 내 말 끝날 때까지 기다려" 선생님은 아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는 바로 고개를 떨궜고 아이 엄마는 선생님에게 손가락질당하고 있는 아이를 눈 앞에서 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곧바로 표정을 바꿔 엄마에게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익히 알고 있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편하다. 선생님의 이런 행동은 아이 내면에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다. ‘권위’를 내세워 위압적으로 아이를 억압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의 훈육 방식이다. 훈육자의 ‘권위’를 주지시킴으로써 아이가 확실히 잘못을 느끼게 하고 순종하게 하는 것.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NO 할 수 있도록 가르친다"고. 그 말은 맞다. 하지만 아이들이 ‘NO’할 수 있기 위해서는 조건이 붙는다. 정해진 규칙인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조건이다.  


 프랑스 교육은 ‘이상적인 교육’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 ‘프랑스 엄마처럼’ 이라는 말은 하나의 로망 코드가 되어 있다. ‘프랑스 교육’ ‘프랑스 육아’ ‘프랑스 수면교육’은 세계 최고의 교육법이자 육아라고 알려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이들의 교육은 이상적인 걸까.


이상적이고 행복한 교육이라고 '모두가 믿고 있는' 프랑스 교육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권위와 통제로서 아이들을 지배하는 프랑스 교육

 

 프랑스인들이 아이들에게 반복적으로 학습시키는 말이 두 개 있다. ‘Merci(고맙습니다)’와 ‘Pardon(잘못했습니다)’이다. 특히 고맙다는 말은 일상의 '당연한 일들'에 끊임없이 소환된다. 엄마가 밥을 차려주었을 때, 아빠가 물을 따라 주었을 때, 할머니가 사탕을 주었을 때, 누군가가 문을 열어주었을 때 아이들은 그때그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한다’. 고마운 마음을 생활 속에서 체득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이들이 그 말을 잊고 안 했을 경우다. 어른들은 그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며’ 끝까지 그 말을 하도록 강요한다. 
 
 ‘빠흐동’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인들은 누군가와 몸이 살짝만 부딪혀도 즉각적으로 이 말이 튀어나온다. 어릴 때부터 생활 속에서 훈련받기 때문이다. 특히 공공장소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용납되지 않기에’ 프랑스 부모들은 그 즉시 '차가운 권위자’가 되어 아이를 나무란다. 아이가 생떼라도 부리면 가차 없이 구석으로 끌고 가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을 낸다. 
 

 프랑스인들이 아이들에게 자주 쓰는 다른 말 중에 'Malpoli(예의 없는)라는 말이 있다. 인사를 안 해도, 음식을 남겨도, 고맙다는 말을 안 해도,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해도, 이들은 아이들에게 '예의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놀다 보면 먹다 보면 쉬다 보면 잊어버릴 수도 있다. 고마운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지 그걸 말하는 게 중요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프랑스인들의 훈육법은 이들이 '예의'라는 형식에 얼마나 집착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그들 문화에 내재되어 있는 귀족문화의 연장선에 있다. ‘남에게 보여지는 나’ 라는 타인의 시선이 가치 기준에 있기 때문이다. 그 기준은 ‘권위’가 되어 상대를 ‘통제’한다.


프랑스 부모들이 아이가 울거나 떼 쓸 때 가장 자주 하는 말 "변덕 좀 그만 부려"
"차가운 권위자의 손가락질" 프랑스 아이들의 흔한 일상이다


 프랑스인들이 아이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또 있다. "Arrête tes caprices!(변덕 좀 그만 부려)" ‘Quel cinéma(꾸며내지 )’ 울거나 떼쓰는 아이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하는 말이다. 왜 우는지를 묻는 게 아니라 울고 있는 자체가 잘못이라는 듯 ‘비난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럽게 울고 있는 아이를 혼자 둔 채 보란 듯이 즐겁게 담소를 나눈다. 일부러 아이를 혼자 두는 것이다. '스스로 깨닫고 강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혼자 울음을 멈춘 아이를 보며 프랑스인들은 '아이가 스스로를 통제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율성의 획득’이 아니라 ‘체념의 학습'처럼 보인다. 고개를 떨군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건 슬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는 ‘변덕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이 말은 훈육의 기준이 아이가 아닌 훈육자에게 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매우 위험한 발언이다. 자신들의 ‘틀을 따르지 않은’ 아이에게 잘못이 있음을 분명히 함으로서, 아이로 하여금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감정 억압 학습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이러한 교육은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똑같이 행해진다. 선생님은 낮고 근엄한 목소리로 아이들을 완벽히 통제하며 틀을 벗어나면 안된다는 것을 엄격한 훈육으로 보여준다. 만3살 때부터 학교에 가는 프랑스 아이들은 막 기저귀를 떼고 와 '규범이 우선인 차가운 사회' 속으로 던져진 채 온종일을 보내는 이다. 한국의 어린이집처럼 선생님이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은 없으며 오로지 규칙만이 존재한다. 아이가 어렸을 때 아침마다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울며 소리지른 이유는 다른 것에 있지 않았다. 아이에게 학교는 ‘차갑고 딱딱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은 울고 소리 지를 권리가 있다"
아이들에게 이렇게 손가락질 하는 것 자체가 마음 아프다


 프랑스인들이 이토록 엄격하게 아이를 기르는 배경에는 그들의 ‘견고한 생각’이 있다. 아이들이 스스로를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독립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언제나 'Cadre()’와 'Limite(한계)’를 정해주며 그것을 철저히 지킬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틀을 벗어났을 때의 차가운 표정과 싸늘한 말투는, 틀을 지키기만 하면 한없는 사랑이 되어 돌아온다. 그것은 ‘사랑에 조건을 붙인 것’으로 아이들 감정을 억압하고 길들인다. 
 
 ‘Quelle comédie(연기하지 마)’ ‘Quel caractère(성질 부릴래)’ ‘T'as fait bêtise(넌 바보 같은 짓을 했어)’ ‘Sois sage(말 들어야지)’. 아이들이 ‘NO’라는 의사를 감정적으로 표현할 때 프랑스 부모들이 가장 자주 쓰는 이 말들은, 프랑스 내에서도 긍정적인 단어로 바꿔 쓰자는 말이 자주 거론된다. 자신들도 그들 교육의 문제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프랑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NO’라는 것이다. 틀 안에 있어야만 안심하는 건 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부모님과 선생님은 '엄격한 권위자'로 존재한다. 그들이 권위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에 의한 ‘이성적 강박’이 프랑스인들을 그렇게 몰아 부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훈육 모습이 ‘교육’이라기보다 차라리 ‘압박’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이렇듯
 
 
프랑스 육아는 ‘자유롭고 열린’ 것이 아니라 엄격한 잣대로 통제되는 ‘감정 억압 학습’에 가깝다. 그렇기에 아이들 내면에 상처를 준다. 아이를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너무나 순종적인 아이들의 고통" - 유령 아이들 
"변덕이라는 단어는, 설명할 수 없고 당혹스런 아이의 행동에 대한 ‘성인의 잘못된 판단’입니다" - 프랑스 소아과 의사


 여기서 떠오르는 것은 콜베르티즘이다. 달콤한 것으로 귀족을 통제하고 길들인 ‘프랑스의 오래된 방식’ 말이다. 귀족 길들이기와 아이들 길들이기는 본질적으로 같다. 똑같이 소중한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이용한 심리통제기 때문이다. 귀족들에게 그것이 기득권 박탈이라면 아이들에게 그것은 사랑의 박탈이다. 엄마의 사랑을 얻기 위해 선생님의 인정을 얻기 위해 아이들은 감정에 위배되는 것이라도 ‘그들의 권위’를 따르게 된다. 그리고 길들여진다. ‘지배의 메커니즘’이다. 
 
 프랑스 소아과 의사 Catherine Gueguen는 말했다.
 "변덕이라는 단어는, 설명할 수 없고 당혹스런 아이의 행동에 대한 ‘성인의 잘못된 판단’입니다" 
 
 프랑스 아이들은 매우 차분하고 밖으로는 웃고 있지만, 무의식 깊은 곳에는 억압된 감정이 쌓여 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기에 알아챌 수 없지만 분명히 진행되고 있는 마음의 상태다. 

 프랑스 교육이 지배와 통제라는 ‘이성적 권위’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겪은 '이상한 프랑스 교육'



* 참고 자료 : "이성의 권위가 유럽사회에 억압성을 가져왔다" "이성과 합리주의가 인간을 억압하고 규제한다" 미셸 푸코 http://asq.kr/jGSEHjqcD5aR"프랑스인들은 행복하지 않다. 프랑스는 비관적인 사회이며 불행한 사회다" "프랑스 문화는 '예, 할 수 있습니다'가 아니라 '아니오, 할 수 없습니다'이다" 소르본대 Claudia Senik 교수 https://url.kr/fdWJtY"프랑스는 지옥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사는 낙원입니다" Sylvain Tesson http://asq.kr/wrmpBv53KEUl"변덕이라는 단어는... 성인의 잘못된 판단입니다" 프랑스 의사 Catherine Gueguen http://asq.kr/Ixtf8YaO7JWb, 부정적인 '육아 어휘들'을 긍정적인 어휘들로 바꾸자는 프랑스 부모단체 캠페인 http://asq.kr/hJejA1TVKgtR파리 사는 미국인 엄마가 보는 프랑스 교육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이며 낡은 모델을 고수한다" "프랑스 아이들은 생각하는 법이 아닌, 전통과 교훈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간다" "프랑스 가정생활도 낡은 구조" "프랑스 아이들은 면전에서는 순종적이지만 자기 통제력이 떨어진다" "프랑스 부모들은 아이들 중심이 아닌 철저히 자신들만의 삶을 산다 https://url.kr/V9Zz8v (번역 http://asq.kr/MeohuRAIbcF5U)



이전 11화 아이템이 없는 나라 프랑스, 시대에 뒤쳐진 '고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