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산책 Sep 23. 2019

조용하고 차분한 프랑스 아이들이
나는 이상했다.

엄격한 통제로 훈육되는 프랑스 아이들. 1편


 한국에 '프랑스식'이라 이름 붙여진 것들에 대한 바람이 불고 있다. 마카롱 열풍부터 프랑스식 육아. 프랑스식 교육. 프랑스 엄마처럼.

 
 물론 이 곳에 살면서, 한국과는 사뭇 다른 교육 분위기나 교육 철학에 공감하고 만족해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도 그러한 쪽에 서서 그들의 교육 방식을 한없는 경외감으로 바라보고 싶었으니까. 무엇보다 내 아이가 길러지게 될 세계. 내 아이가 들어가게 될 세계는 다른 곳도 아닌 유럽, 선진대국이라는 나라였다. 그렇게 그들의 것은 무엇이 다를까 궁금했고 기대했고 기다렸었다. 하지만 점점 그 기대는 거북함으로 바뀌어갔고 실망감으로 돌아왔으며 결국 커다란 질문을 가져왔다. 

 프랑스 학교는 만 3세부터 학교 과정이 시작되기에 모든 아이들은 4살 정도에는 '마떠넬'이라 불리는 학교에 들어간다. 우리로 치면 어린이집과 유치원 과정을 합한 과정이다. 우리 아이는 생일이 늦은 관계로 3살 반에 학교에 들어갔고 반에서 '가장 어린아이'였다. 기저귀는 학교 입학 일주일 전에 떼었다. 그 어린것을 온종일 학교에서 보내게 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내심 기대를 했었다. 모든 것을 떠나 '프랑스 학교' 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는 몇 개월이 넘도록 매일 아침마다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소리 지르며 떼쓰고 울곤 했었다. 
 
 그런 아이를 나는 아침마다 다그치며 때론 함께 목소리 높여가며 겨우 옷을 입혀 학교에 보냈고 그렇게 매일 아침 우리는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여기 사람들은 당연히 하는 것들에 '멋모르는 이방인 엄마' 소리 듣고 싶지 않았기에 그들의 룰을 최대한 잘 따라주어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다. 하지만 매일 아침마다 절규에 가까운 모습으로 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아이를 학교에 '집어넣고' 올 때마다 마음이 너무 무거웠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았다. 왜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어했었는지를. 
 

'우리 아이들은 울고 소리 지를 권리가 있다' 


 프랑스 학교는 언제나 무언가 '매우 질서 있는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3살반 4살 아이들이라도 일단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매우 차분한 모습'이 되어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런 차분한 분위기가 참 좋아 보였다. 어쩌면 아이들이 저렇게 질서 정연하고 조용하게 있을 수 있을까 감탄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러다 어느 날 아이들이 둘씩 손을 잡고 줄 맞춰 이동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교실에서부터 목적지를 지나 다시 교실로 돌아오기까지. 스무 명 가까이 되던 그 어린아이들은 하나같이 조근조근 낮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하거나 입을 다물고 있었고, 튀는 아이 하나 없이 흐트러진 모습 없이 교실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내 안에 무언가 커다란 의문이 솟구쳤다. 
 
 '저렇게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하나같이 다 차분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할 수 있지?' '어떻게 해놓았길래 아이들이 단박에 저렇게 쥐 죽은 듯이 움직일 수 있는 거지?' '무언가 자연스럽지 않다' '어린아이들이라면 한창 에너지가 넘쳐서 몸을 움직이고 싶고 뛰고 싶고 큰소리로 말하고 싶고 깔깔깔 거리고.. 그래야 어린아이 다운 거 아닐까?'  
 
 '왜 이 아이들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지 않지?' 나의 질문은 그렇게 출발하였다. 
 
 그렇게 그 광경은 나에게 '옳다. 좋다'는 느낌보다는 '잘 훈련된 애완동물들'의 모습을 보는 듯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프랑스 학교는 '마떠넬 과정'부터 학교라는 개념으로 편입시켜 '규율과 규칙'을 엄격하게 가르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아라 해서 한국처럼 '따뜻하게 돌봐주는' 개념이 아닌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기본기'를 훈련하는 개념으로 엄격함을 토대로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 막 기저귀를 떼고 온 어린아이들은 '따뜻한 엄마 품'을 떠나 갑자기 '규범이 우선인 차가운 사회' 속으로 던져진 채 오후 4시반까지 온종일을 보내게 되는 것이었다. 프랑스 선생님들은 '절대로 큰 소리 내지 않지만' 

 '
낮고 차가운 목소리와 눈빛으로' 아이들을 '완벽하게 통제하며' 함께 어울리는 사회 안에서의 '올바른 행동과 자세'를 끊임없이 주입시키고 그 '틀'을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프랑스 엄마들은 아이들이 절대로 '선'을 넘지 않도록 철저하게 훈육한다


 그러한 '딱딱하고 차가운 학교 분위기' 때문에 우리 아이는 학교에 가기 싫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는 꾸준히 학교를 싫어했다. 아이가 조금 더 자란 후 왜 학교에 가기 싫은지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눌 때마다 아이가 했던 말은 늘 반복되었고 그 속에 모든 이유가 담겨있었다. 
 

 "교실에서 우리는 친구들이랑 마음껏 얘기도 할 수 없어. 선생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손을 들고 있어야 해. 선생님이 허락해주었을 때에만 얘기할 수 있어. 밥 먹을 때에도 지켜보는 다른 선생님이 있어. 우리가 조금만 큰소리로 얘기하면 바로 경고를 받아. 우리는 떠들 수도 없어 말할 수도 없어 조용히 밥만 먹어야 돼. 이게 뭐야. 너무 싫어. 감옥 같아"
 
 심지어 아이가 6살이던 어느 날은 애가 학교에서 바지에 오줌을 싸고 온 날이 있었다. 알고 보니 급식시간에 너무 화장실이 가고 싶어 '손을 들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자기에게 '말해도 된다는 허락을 해주지 않았고' 선생님의 '허락 없이 입을 떼면 경고를 받아야 했기에' 선생님 허락을 기다리다가 그리 되었다고 했다. 
 
 아무리 '통제'가 중요하다지만 이건 아니지 않은가 싶어 다음날 학교 선생을 찾아가 얘기를 하니 "죄송하게 되었네요. 잘 말해두겠습니다" 하고 끝. '불필요하게 엄격한 급식시간 분위기'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왜 이렇게나 엄격하게 통제를 해야만 하지? 다른 엄마들은 이런 분위기에 수긍을 하고 동의를 하나? 그것이 궁금하였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프랑스 교육 자체가 아이들에게 '혹독할 만큼 매우 엄격하다'는 것을. 프랑스 엄마들 또한 집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을. 그들은 그것이 '아이들을 위한 길'이라고 믿는다는 것을.
 
 그렇기에 프랑스 아이들은 그토록 '조용조용히 말하고' '늘 차분하며' '말 잘 듣고 착한 아이들'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 모든 아이들이 '그토록 차분하고 조용한 것'이 너무 이상하기만 하였다. 

 
 





코로나가 알려준 것, 프랑스는 우월하지 않다


어디가 선진국이고, 어디가 문명국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