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산책 Sep 24. 2019

프랑스 아이들,
'틀' 안에서만 허용되는 행복

엄격한 통제로 훈육되는 프랑스 아이들. 2편


 너무도 '얌전한' 프랑스 아이들을 보며 한국의 어린아이들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까불까불 대며 큰 소리로 묻고 말하는 모습,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내 친구들과 뒤 엉겨 노는 모습, 궁둥이를 자유롭게 흔들거리는 모습, 그렇게 아무 때고 불쑥 말하고 재잘거리는 모습. 하지만 그것이 아이답고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던 모습. 그렇게 내게 어린아이들이란 '아무런 질서도 없는' 혼란 그 자체인 어떤 생명체들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아이들은 달랐다. 언제나 차분하게 정돈되어 있는 그 분위기는 왠지 자연스러운 아이들의 모습이라기보다 무언가 '규격에 맞게 존재하는 인형들'에 가깝게 느껴졌다. 어떻게 이 것이 가능할까? 그것이 나의 두 번째 질문이었다.  
 
 프랑스 교육이 그토록 엄격할 수 있는 배경에는 그들이 가진 어떤 '견고한 신념'이 있었다. '아이들이 스스로를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독립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없다'는 생각. 그러한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은 단호하게 선을 그어주어야만 아이들이 '스스로 절제하고 자율성을 지닌 사람으로 자란다'는 것이다. 
 
 이들의 교육이 우리와 가장 다른 점은, 프랑스 부모와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절대적으로 엄격한 권위자'라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부모 삶을 '지배하도록' 놔두는 것이 아닌 부모가 아이들을 '통제한다'는 것이 그들의 제1원칙칙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이 중심'이라기보다 '부모가 정해놓은 틀'이 기준이 된다. 

'꺄드흐'(cadre:틀)라는 '일정한 규칙'을 정해놓고 그 '틀'을 벗어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것.
 

프랑스 부모들은 그 순간 '엄격한 권위자'가 되어 손가락질한다

 
 그렇기에 그 '틀'을 벗어난 행위는 엄하게 꾸짖되 그 '틀' 안에서는 한없는 자율과 사랑이라는 선물이 제공된다. 이렇듯 '부모가 주체가 된 육아'가 나온 배경에는 그들의 '개인주의'가 있었다. 즉 '부모도 함께 행복해야 한다'라는 그들의 생각이 그것이다. 그렇기에 신생아 때마저 다른 방에서 따로 재우는 '수면 교육'이 가능하고, 아기가 밤에 자다 깨어 울어도 바로 달려가거나 안아주지 않고 '지켜보는' 교육이 가능하며, '저녁 시간은 부모를 위한 시간'이라고 그들은 공공연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교육이 아이의 '자율성'을 길러주고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지게 하는' 보다 독립된 존재로의 성장을 도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 프랑스인들은 이러한 '거리두기'야말로 '아이가 주체가 되는 교육'이고 '부모가 함께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들의 훈육법이 때로는 '몰인정적으로' 보일만큼 너무나 냉정하게 여겨졌고, 그것이 아이들로 하여금 '감정 억압 학습'을 하게 하는 것으로 보였다.
 

  오래전, 한 프랑스 친구네 가족 모임에 초대를 받았을 때였다. 친구네 부모님 친구네 형제들과 다 함께 '해변가의 저녁 만찬'을 앞두고 있던 찰나, 친구의 딸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놀다 말고 엄마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친구 딸아이는 엄마에 대한 요구가 관철되지 못하자 인상을 쓰며 울기 시작했다. 큰 소리로 운 것도 아니었고 내가 보기엔 그냥 자연스럽게 감정을 표현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친구는 자기의 딸을 향해 매섭도록 차가운 표정과 목소리로 말하였다. "변덕 좀 그만 부려!" 
 
 아이는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헌데 친구는 딸아이에게서 돌아서자마자 우리를 향해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으며 식탁에 앉는 것이 아닌가. 친구의 남편도 아이의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아이의 이모와 삼촌도 모두가 '서럽게 울고 있는 아이를 혼자 둔 채' 보란 듯이 식탁에 앉아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일부러 아이를 혼자 두는 것이었다. '스스로 깨닫고 강해져야 한다'는 그들의 '훈육법'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나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함'으로 보였다. 
 
 나는 혼자 남겨져있는 아이가 마음에 걸려 아이에게 다가가 어깨를 다독이며 "괜찮아. 우리 같이 가서 밥 먹자"는 말을 했다. 허나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어른들'은 나에게 손사래를 치며 빨리 오라고 하였다. '아이 버릇 나빠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울고 있는 아이를 혼자 둔 채 '즐겁게 식사하며 웃고 떠드는 어른들'의 모습은 내게 거북한 느낌마저 들게 하였다. 

 
결국 친구 딸아이는 혼자 울음을 그친 뒤 뒤늦게 와 식사를 하였지만, 고개를 떨군 채 앉아있는 그 모습에서 나는 '깊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는 이제 겨우 여덟 살이었다.
 

"너의 변덕을 멈춰" (변덕 좀 그만 부려!)

 
 친구는 '아이가 항복하였고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통제했다'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자율성의 획득이 아니라 체념의 학습'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광경은 친구네만의 유별난 사례가 아니라 '프랑스 가정의 일반적인 훈육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특히 그들의 훈육 중에 내게 가장 거슬렸던 말은 그들이 자주 쓰는 "변덕 좀 그만 부려"라는 말이다. 프랑스 부모들은 아이들이 울 때마다 이 말을 '버릇처럼' 자주 한다. 그리고 정말 눈물이 쏙 빠지도록 무섭게 혼낸다. 하지만 아이들이 우는 이유와 화가 나는 이유가 꼭 '변덕을 부려서'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때그때마다 다양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것이 더 합당하다. 또한 아이들이 울고 떼쓰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감정의 표출'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프랑스 부모들은 아이들의 그러한 모습을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무시하려는 듯' 보였다. 그러한 경우는 대게
 
  '자신들이 정해놓은 틀을 벗어난 경우'이고 그것은 애초에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에 저항하는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감정까지' 함께 용납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부모가 내민 '틀'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아이들도 그것에 '저항'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정해진 '틀'을 벗어나는 것도 용납이 안되고, 그것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용납이 안된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아이들의 자율성과 독립심은 꼭 그렇게 해야만 길러질 수 있는 것일까? 더구나 그 '틀'은 아이들이 아닌 부모와 학교가 사회가 정한 것들이다.
 
 그들의 '확고한 교육 신념' 앞에서 나는, 언제나 고개를 크게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 메인 사진 문구 : "유령 아이들, 너무 순종적이기만한 아이들의 고통"

프랑스는 전통적인 군국주의 국가


프랑스가 근대 일본을 만들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