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만에 해가 나왔다. 이렇게 반가울 때가.
가을 겨울이 우기인 프랑스는, 가을이 시작된 날부터 해 뜨는 날보다 비 오는 날이 더 많다. 거의 매일같이 먹구름이 끼어있는 하늘. 축축한 공기. 영하로 기온이 내려가지 않아도 으슬으슬한 한기.
처음 이 곳의 '깜깜한 겨울'을 보내며 많이 답답하고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겨울이 다 가도록 그 몇 개월을, 해를 못 본 채로 먹구름 낀 하늘 아래를 살아가야한다는 것이 얼마나 암담했던지. 태양이란 존재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었다.
올 가을 겨울도 거의 매일 비가 온다. 파란 하늘은 없고 매일같이 시커먼 하늘과 비바람이라니. 몸도 무겁던 찰나 반갑게도 봄날 같은 햇살이 나와주었다. 이럴 땐 무조건 광합성 모드로 전환이다. 언제 또 먹구름이 들이닥칠지 모르니. 외출 준비는 언제나 초스피드. 내 동절기 전용 모자인 밤색 벙거지를 새집이 지어져 있던 머리에 뒤집어쓰고 운동화를 신고 가벼운 에코백 하나면 끝.
햇살에 부서지는 강물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앙상한 플라타너스 가지들이 파란 하늘에 대고 기지개를 켠다. 다리를 건너 집 앞에 난 강을 따라 계속 걷는다. 얼마 만에 걷는 걸음인지.
모처럼 해가 나오니 사람들이 강가를 걷거나 뛰고 있다. 물냄새가 올라온다. 고향 같은 냄새. 유람선이 지나간다. 강물에 그려진 동심원으로 파도가 친다. 바닷가에 서있는 듯 물소리가 들린다. 내가 좋아하는 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노부부의 걸음 소리...
완벽한 순간이다. 온화한 햇살과 나무와 물. 그 곁을 조용하고 느리게 혼자 걷는 나.
오랜만에 시내쪽까지 걸어와본다. 강 옆을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춘다. 강가에 곱게 진열되어 있던 헌책들 앞에서. 오래된 그림책들, 고지도들, 여행책들.. 그중에 한눈에 들어온 책. 내가 좋아하는 두 개를 다 가지고 있던 이름. <소금 여행자들> 소금을 찾아 길을 떠나는 티벳 사람들의 이야기다.
책장을 넘겨 본다. 보기만 해도 좋은 티벳 사람들의 모습과 표정. 그들의 배경을 흐르는 공기. 정제되지 않은 투박한 사진들이 여행자의 시선으로 이야기와 함께 실려있다.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티벳 여행의 실현을 위해 더 꾹꾹 눈에 담아두고자 구매를 결정한다. 작고 따뜻한 행복.
걷다보니 배가 고파온다. 예전 같으면 한 끼 정도 식당에서 해결해보려 시내 안쪽으로 발길을 돌렸겠지만 지금은 코로나 시대. 그래도 한국 슈퍼에서 김치만두는 꼭 사 오고 싶어 찾아갔건만 셔터가 굳게 닫혀있다. 결국 티벳 여행사진책 하나 건졌다. 그래도 좋다. 멋진 오후를 걸었으니.
브런치북 끝낸다고 종일 책상머리에 앉아있던 가을동안 몸을 너무 안 움직였다. 밥까지 제대로 안 챙겨 먹어 영 볼품이 없어졌다. 어떤 것에 몰입하면 시간 개념이 사라져 현실을 이탈해버리는 나. 작년 가을처럼 또 그 상태로 살았으니. 미련함이다. 아니, 몸을 돌보지 않음은 어리석음이다. 이젠 건강한 몸과 함께 글 쓰는 것을 체득해야 할 때. 그래야 할머니 될때까지 오래오래 쓸 수 있다.
땡초김밥과 꼬막비빔밥을 파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추어탕과 낙지볶음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밥은 하기 싫고 맛있는 한식은 먹고 싶고. 그럼에도 올해는 김치냉장고에 김치도 큰 통으로 두 통이나 담아놨으니 그만하면 애썼다. 그리고 떠오르는 숙제. 그간 미뤄놓은 것들이다. 정리 못하고 있던 아이방 벽장을 뒤집어 엎어야 하고, 걸레질 한지 오래된 바닥을 쓱쓱 닦을 때.
집에 돌아와 시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다. 며칠 전 사진에서 뵈었을 때 더 마르신 듯한 얼굴에 마음이 영 안 좋았기 때문이다.
"어머니 저예요!" "응, 뭐하고 지내니?" "산책도 하고 차도 마시고 글도 쓰고 아주 잘 지내요" "그래 좋구나" "어머님 밤에 잠은 잘 주무세요?" "요즘도 중간에 한번씩 깬다" "잠들기 전에 몸을 편안하게 이완하고 주무세요" "나는 그게 안돼" "안되는게 어딨어요. 하면 돼요. 해보려고 노력해보세요. 아로마 향초 방에 피우고 주무시고요" "전화 줘서 고맙구나. 좋은 저녁 보내렴" "네 어머님도요!"
오랜만에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도 전화를 드렸다. 오래 얼굴을 못 봤으니 오늘은 페이스톡으로. 두 분 모두 통통하게 살이 오르셔서 매우 보기가 좋았다.
"아빠! 얼굴 너무 좋아졌는데? 진짜 보기 좋다" "너는 왜 이렇게 말랐어" "어. 나 밥을 잘 안 챙겨 먹어서. 밥하기 귀찮은데 해주는 사람도 없고" "빵이라도 사다 먹어야지" 엄마가 옆에서 거든다. "아니, 나 빵은 별로 안 먹고 싶어서. 알아서 밥 잘 챙겨 먹을게요" "코로나 조심하고. 들어가라"
아빠의 밝은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어렸을 때 보았던 그 얼굴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그때 그 얼굴로 나를 보고 웃어주던 전화기 너머의 아빠 모습.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그 웃음을. 볼 수 있어 행복했다.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분들. 한 생의 끝에 서 계신 분들. 미워했던 그 마음들은 저 강물에 다 훌훌 벗어버린다. 내 마음도 따라 함께 버린다. 그렇게 계속 나를 버리고 또 버린다.
저 산의 이름 없는 흙이 될 때까지. 햇살에 부서지는 파도가 될 때까지. 바람에 흩어지는 숨이 될 때까지.
버릴 수 있다는 건 아름답다. 그래서 겨울이 좋다.
많이 가지는 건 무겁다. 그래서 운동도 걷기를 좋아한다. 아무 것도 필요 없기 때문이다.
체력을 회복하려면 또 한참 시간이 걸릴 듯 하다. 그럼에도 마음만은 즐겁다. 내 안의 고요 속에 머물고 있는 나를 느끼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도 불평이 없는 겨울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사실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거기에는 불필요한 감정들이 포함된다.
그래서 오늘도 버리는 즐거움을 누린다.
버릴 수 있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