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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Aug 22. 2019

외할머니의 가마솥 누룽지

냄비밥에서 건져올린 유년의 향수


 여름은 늘 내게 가장 분주한 계절이었다. 시댁 가족들과의 연례행사인 여름휴가 일주일과 우리 가족끼리의 휴가 일주일. 방학인 아이와 남편의 추가 휴가. 그리고 어제, 모든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긴 휴가의 끝 집에 온 기쁨 중 하나는 여름휴가 동안 먹을 수 없었던 김치를 꺼내 밥을 먹는 것이다. 짐을 다 정리하고 나자 밥 먹을 시간이 성큼 다가왔다. 냉장고는 텅 비어있었지만 배는 고팠다. 아이가 물었다. "우리 언제 밥 먹어?"  "응 간단하게 해서 지금 먹자"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아이는 참치 통조림에 김을, 남편은 바게트 빵에 치즈를, 나는 고추 조림과 파김치로 세상 간단한 컴백홈 밥상을 차리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냥 밥만 퍼서 상 위에 놓으면 끝이라 생각했건만. 내가 반년 넘게 '냄비밥'을 해 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순간 기억해냈다. 아뿔싸. 밥이 다되기까지 40분은 족히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였다.
 
 "미안. 엄마가 밥 되는 시간을 생각 못했어. 조금 기다려야 하는데 괜찮겠어?"
 "그럼 나 누룽지 해줘! 그럼 기다릴 수 있어!" 

아궁이가 있던 외갓집의 초가가 많이 그리웠다


 어릴 적 외갓집은 시골의 으슥한 언덕배기에 있던 작고 아담한 초가집이었다. 마을 어귀에 차를 주차하고도 한참을 수풀이 우거진 터널 같은 오르막길을 지나야 나타나는 집. 울퉁불퉁한 흙길로 된 오르막길 옆으로는 돼지 축사가 있었던지 늘 돼지들 소리가 가까이서 들리곤 했는데, 어둠이 깔려있을 때 그 소리를 들으며 길을 오를 때에는 여러가지 무서운 상상들이 떠오르곤 했었다.  


 하지만 그 터널만 통과하면 길의 끝에는 언제나 다정한 오두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떠올려도 따스한 '우리 외갓집'이.


 외갓집 담벼락은 대나무들로 둘러쳐져 있었다. 식물원에서 보던 멋들어진 나무가 아닌 그냥 '담'으로 대충 쳐져있던 노쇄한 대나무들이었다. 아담한 마당이 있었고 작은 대청마루에 앉아있으면 마당 한쪽에 있는 펌프와 빨강 파랑 플라스틱 대야 그리고 할머니의 장들이 담겨있는 장독대들이 보였다.


 집 옆으로는 할머니가 기르시던 온갖 작물들이 자라고 있는 꽤 넓은 밭이 있었다. 할머니는 그것들을 정성스레 키워서 장에 내다 파신 돈으로 6남매를 키우셨다. 밭 옆으로는 산속으로 난 오솔길이 있었는데 그 옆의 경사진 공터에서 할머니네 '비료포대'로 타던 눈썰매가 어찌나 재밌었는지 지금도 가끔 아이에게 말하곤 한다. 비료포대 눈썰매가 최고라고.


 외갓집에는 작은 방이 두 개 있었는데 우리들은 그중에서도 더 작은 방 구들에서 함께 이불을 덮은 채 둘러앉아 노는 걸 좋아했다. 방바닥에 몸을 대고 앉으면 따끈따끈하게 올라오는 아궁이의 열기가 어린 나이에도 그렇게 좋았다.


 아궁이가 있던 부엌. 할머니의 부엌은 외갓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공간이었다. 

 부엌 한쪽에는 외할아버지가 산에서 해오신 나뭇가지들이 수북이 쌓여있었고 그 앞으로는 두 개의 아궁이가 있었다. 아궁이 위에는 언제나 커다랗고 까만 무쇠솥이 올려져 있었고 할머니는 그 솥으로 우리에게 밥을 해주시고 국을 끓여주셨다. 밥이 되어가는 동안 우리는 서로 아궁이에 땔감을 던지겠다며 저마다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나뭇가지들을 아궁이 속으로 던지곤 하였다.


 그렇게 한참을 '놀고 나면' 밥 냄새가 올라왔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외할머니의 가마솥밥이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찬들로 풍성한 밥상을 차려주시곤 하셨다.

 머웃대 들깨나물, 말린 호박 무침, 고구마순 김치, 찐 호박잎, 깻잎전, 된장 고추 장아찌, 장독대에서 막 꺼낸 묵은지와 동치미... 특히 할머니가 직접 담근 고추장으로 끓여주시던 고추장찌개 맛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할머니 밥상은 그렇게 우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신비롭고' '가장 맛있는 밥상'으로 통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가마솥밥에서 나오던 외할머니의 누룽지였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외할머니 밥과 누룽지 (사진: KTV 국민방송)


 지금도 그 무쇠 가마솥의 밥 맛을 잊을 수가 없지만 그 속에서 나오던 누룽지는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을 만큼 '완벽한 무엇'이었다. 그처럼 따뜻하고 그처럼 구수하며 그처럼 오묘하게 나를 감싸 안아주는 어떤 아우라. 지금은 안다. 그것은 그 누룽지 안에 녹아있던 외할머니의 무한한 헌신과 사랑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누룽지'는 내게, 유년시절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대표하는 상징 같은 것이 되었다. 


 해서 식당에 가도 그냥 공깃밥보다는  돌솥밥을 시켰다. 누룽지를 먹을 수만 있다면 아무리 배가 불러도 끝까지  먹곤 하였다.  누룽지만의 깊은 아름다움을 우리 아이도  느낄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번 여름, 한국에서 제대로된 솥밥 누룽지를 맛본 아이가 밥을  먹고도 누룽지만  그릇을 비워냈을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그 후로 냄비밥을 하는 기쁨이 두 배로 생겨났다. 아이가 늘 "누룽지!" 하며 마지막 남은 눌은밥들을 싹 해치워주기 때문이다. 역시 너는 한국인 맞구나! 라는 깊은 감정이 올라옴은 사실 어떤 거창한 순간보다도 이럴 때 가장 크게 솟아나곤 한다.


 "누룽지 진짜 맛있어 엄마!"


 누룽지를 오랜만에 먹은 아이는 기쁜 얼굴로 밥그릇을 싹싹 비웠다. 그 모습을 보는내내 외할머니의 가마솥 누룽지가 함께 마음을 따뜻하게 적셔왔다. 파김치와 함께 먹는 누룽지가 더없이 꿀맛임은 당연하였고.  



* 메인사진 : 데일리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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