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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Nov 01. 2019

땅과 함께 추는 춤  

열무김치 담근 날

 
 매년 이맘때 즈음엔 이곳에 한국산 무가 나온다. 당연히 여기 시장에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한 한국분께서 프랑스 농가에 위탁 재배한 '열무'가 나오는 것이다. 맛있는 무를 찾아볼 수 없는 이곳에서 한국 무를 먹을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얼마나 눈물겨운지.

 
 프랑스 무는 '맛이' 없다. 무로 만든 요리 자체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 사람들은 순무에 가까운 쓴 맛이 나는 동그란 무를 주로 익힌 요리용으로 먹고, 검은 무라 해서 검은색 껍질로 된 무를 채 썰어 샐러드를 해 먹거나, 손가락만 한 작은 홍당무를 샐러드에 넣어먹는 게 다일뿐 우리만큼 다양하게 무를 요리에 활용하지 않는다. 그마저 모두가 쓴 맛이 나고 한국 무처럼 달고 맛있지 않다.

겨울철 잠깐 하얀 무가 반짝 시장에 나오지만, 아주 신선하지 않으면 퍼석거리거나 바람 든 것이 태반이다. 그러하니 적당히 당도가 있으면서 과즙이 옹골차게 들어찬, 단단하고 맛있는 한국 무에 대한 빈자리는 매우 크다.
 
한국 무가 월등히 맛있다는 것은 정직한 아이 입맛으로 바로 입증이 된다.

 파리 한국 슈퍼에는 조선무가 있기에 파리에 갈 때마다 꼭 무를 사 오는데, 그 무로 동치미를 담가 아이에게 어릴 때부터 먹이곤 했었다. 아이는 맛있다며 따박따박 잘도 받아먹었다. 어느 날, 조선무를 구할 수 없어 그냥 여기 시장에서 가장 싱싱한 무를 사다가 동치미를 담근 적이 있었다. 아이는 단번에 말했다. "이 무는 맛이 없어. 엄마 먹어" 맛있는 건 알아가지고.
 
그러다 소식을 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한 한국분이 가을마다 열무와 조선무를 직접 생산하고 판매한다는 것을. 나는 바로 수소문하여 찾아갔고, 그때부터 우리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김치인 열무김치를 담기 시작했다.
 

왼쪽: 프랑스에서 보통 '무'라고 하면 이것을 말한다 / 오른쪽: 검은무. 껍질을 벗겨 샐러드로 먹는다


 작년까지는 김치 냉장고가 없었기에 기껏해야 5킬로 정도 사서 담갔지만 올 해는 말이 달라진다. 한국서 날아온 김치냉장고가 생겼기에. 그래 봤자 어차피 거의 내가 혼자 먹는지라 너무 많은 양을 할 수는 없었고 12킬로를 주문했다. 어제 그걸 찾아왔고 오늘 드디어 출격. 잎과 줄기를 다듬고, 수세미로 무를 빡빡 문질러 씻은 다음, 굵은소금 휘리릭 뿌려두고 양념 만들기.
 
한국서 가져온 외할머니표 고춧가루와 매실청 액젓 소금 마늘 생강을 꺼내놓고, 양파를 썰어놓은 다음 믹서기로 분쇄에 들어간다. 위이잉- 쓰릅! 일이 터졌다. 적당량을 넣었어야 했건만 양 조절 실패.

고춧물이 믹서기 뚜껑 밖으로 삐져나와 초강력 회전 상태 그대로 사방에 튀었다.

이럴 수가. 내 옷, 부엌 바닥, 싱크대, 씻어놓은 김치통, 창문, 심지어 머리칼에까지.... 이럴 줄 알았다. 헐렁한 현실감 어디갈까. 사고가 안 나면 내가 아니지. 몇 달만에 하는 김치라고 그새 감을 잃어 이게 웬 난리람. 양념 만들다 말고 부엌 청소에 들어간다.
  
눈물의 고춧물 닦아내기 대청소가 끝나고 드디어 양념 완성. 근데 뭔가 좀 허전하다. 뭐가 빠진 거 같은데? 뭐였더라? 찹쌀풀! 찹쌀풀을 먼저 만들어놓고 식혀놓았어야 했건만, 그것도 잊어버리고 양념 다 했다고 혼자 좋아하다니. 그래 찹쌀이 어디 있었더라. 냉동실에 넣어둔 찹쌀가루를 꺼내 풀을 쑨다. 마음을 가다듬고 오로지 찹쌀풀에만 집중하여 마음을 비운다. 찹쌀풀과 하나가 된다. 평안해진다.
 
김치냉장고 가져다준 친구가 한국서 올 때 선물로 가져온 큰 스탠 대야를 꺼내 헹궈놓은 무를 담는다. 썰어놓은 양파를 투척하고 빨간 고무장갑을 낀 채로 양념 투하. 쓰윽쓰윽- 이 고운 빛깔. 그래 이 맛이지. 김치를 하는 건 이 맛이지. 마지막 이 고운 빛깔의 빨강을 볼 때.
 
그리고 드디어! 김치냉장고에 들어있던 김치통에 처음으로 들어가는 나의 김치들. 보물이 쌓이는 소리. 그렇게 나는 오늘. 세상 가장 큰 부자가 되었다. 김치 하나로.
 

오늘 담근 열무김치

 
남편과 아이가 어머님 댁에 간지 일주일이 되었다. 이 소중한 시간은 왜 이리 빨리도 흐르는지. 원래 내일이 오기로 한 날인데 아까 남편에게 연락이 왔다. 차에 문제가 생겨서 내일 못 올 수도 있다고. 오! 이렇게 반가울 때가. 가슴이 열린 건 열린 거고, 혼자만의 시간이 좋은 건 좋은 거다. 하루라도 밥을 안할 수 있다면. 하루라도 더 늘어지게 있을 수 있다면.


나는 사실 결혼하기 전에 음식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맛집이나 다닐 줄 알았지, 집에서 밥을 해서 먹는다는 것의 따뜻함과 즐거움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살림을 하게 되면서, 요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내게 마법과 같은 것이었기에.


음식을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내가 비로소 땅 위에 두 발로 서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채소를 다듬고 씻으면서 나는 '땅의 기운'이 내게로 옮을 느꼈고, 그것을 조리하면서 내가 땅과 하나 되는 충만함 속에 있었으며, 그 순간들은 내게 '땅에서 난 것들'의 귀함을 알게 했고, 그것이 내 몸으로 들어감에 감사하게 했다.

그것은 어떤 것보다 신성하고 고귀한 체험이었다.


신성한 땅의 기운으로 남을 살리고 나를 살리는 행위. 나에게 음식을 한다는 것은 이러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 땅에 감사한다. 내가 이 땅에 살지 않았더라면, 내가 계속 한국에 살았고 워킹맘이었다면, 지금의 이러한 마음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기에.

그러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에 나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함께 나누는 기쁨을 배울 수 있었다. 


땅의 기운을 가져와 함께 춤을 추는 것. 오늘은 빛깔 고운 김치로 춤을 추었다. 



* 메인 사진 : 김치로 변신 하기  예쁜 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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