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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Sep 02. 2019

거북한 크리스마스,
참을 수 없는 '문명의 이기'

유럽 살이 극한 고독의 여정 15화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시간을 지나 금세 겨울이 왔다. 거리 곳곳에는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었고 프랑스인들에게 가장 큰 '명절'인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가장 큰 명절답게 모든 가족들은 여름휴가 때처럼 모두가 또 일주일의 휴가를 내고 다 같이 시댁에 모였다.
 
 거실 한쪽에는 커다란 전나무가 멋진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천정이 높은 거실에 걸맞게 폭도 넓고 키도 큰 전나무였다. 빨강 초록 구슬 장식들이 매달려있는 나무에는 은은한 전구 장식이 나무를 휘감아 돌며 반짝이고 있었다. 유럽의 클래식 고전동화에서 많이 보아온 장면이었다.
 
 크리스마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식사는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이었다. 그 날 저녁은 어느 때보다 성대한 만찬이 이루어지기에 모두는 식사를 앞두고 기품 있게 갖추어진 옷을 입고 식탁에 나타났다. 나도 '그들의 룰'을 따라 가장 괜찮아 보이는 원피스와 함께 오래전 몇 번 해본 게 다인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를 꺼내어 착용하였다. 
 
 식탁은 화려한 어머님답게 화려함의 극치로 채워져 있었다. 은촛대 위에는 빨강 초들이 크리스마스 꽃장식 사이로 은은한 불빛을 밝히고 있었고, 은수저 은포크 은나이프가 반짝이는 접시와 함께 한치도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식탁 한쪽에는 최고급 푸와그라가 무화과잼과 함께 놓여 있었고, 식탁 가운데에는 2층으로 된 커다란 은쟁반에 풍성한 해물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크리스마스 음식으로 칠면조를 먹기도 하지만 시댁은 그보다는 '석화'를 먹는 것을 더 좋아하였다. 석화, 모시조개, 성게는 싱싱한 상태 그대로 껍질째 정갈하게 놓여있었고, 랑구스틴과 골뱅이 새우는 물에 데쳐 살짝 익힌 상태로 쟁반을 풍성하게 채우고 있었다. 쟁반 옆으로는 수제 마요네즈 소스와 굴에 뿌려먹는 레몬 조각들 그리고 와인을 넣은 특제소스가 놓여 있었다. 쟁반이 그럴듯해 보였던 건 사실 해물들 밑에 장식으로 깔려있던 해초들 덕분이었는데, 우리는 일부러 먹는 저 해초들이 장식용으로만 쓰였다 버려진다 생각하니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우아한 교양인의 미소. 매끈한 문명인의 방식


  우리는 식탁 주변에 서있었다. 중요한 식사자리에서는 늘 어머님이 정해주시는 자리에 앉아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님이 한 사람씩 이름을 호명하였고 착석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내 자리가 시누이 자리와 겹쳤다. 어머님은 착각하셨다며 다시 자리를 정돈하셨고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니 남자 옆에 앉으렴. 그게 좋겠지?"  외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서슬 퍼런 질투가 느껴졌다. 여느 때처럼 '우아한 미소'를 지으신 채로. 

 미소와 
함께 갈 수 없는 공기. 그 마음들이 미소와 함께 건네질 때마다 내 안에서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이 솟구치곤 하였다. 교양인의 미소 문명인의 방식. 그랬다. 그건 문명인의 방식이었다. 나는 할 수 없는 어떤 것이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오래도록 학습된' 생활 속의 어떤 것이었다.

 허나 크리스마스의 진짜 거부감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그들의 '크리스마스 선물' 문화였다. 크리스마스 때에는 언제나 거의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가족 수대로' 선물을 준비해오는 것이 관례였기에 우리는 가져온 선물들을 꺼내 거실 한쪽으로 가져갔고, 선물들이 다 준비되었으니 들어와도 좋다는 어머님의 소리와 함께 다 같이 거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뭐라 표현할 수 없던 이질적인 광경.
 
 

 크리스마스트리 아래로 '열몇 개의 탑'이 세워져 있었다. 거실이 꽉 차도록 커다란 선물꾸러미들이 가족 수만큼 여기저기 '산처럼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포장지들도 하나같이 고급스러운 것들. 주먹만한 고급 리본들이 예쁘게 꽈리를 튼채 꽃처럼 얹어져 있었다. 순간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말할 수 없는 강한 거부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 순간 이질감을 느낀 건 나였을 뿐, 모두는 행복한 표정으로 탄성을 지르며 온갖 미사여구들을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그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시누이들은 선물을 하나씩 뜯을 때마다 "크리스마스 선물 포장지를 뜯는 건 언제나 제일 신나는 일이지" 같은 말들을 뱉어내었다. 매번 크리스마스 때마다 이런 산더미 같은 선물꾸러미 속에 파묻혀 살았었다는 얘기였다. 역시나 나와는 너무나 먼 얘기였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 가장 기뻤던 적이 언제였는지 생각해보았다. 어릴 적 아빠가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48색 크레파스. 그것이 가장 기뻤던 크리스마스 선물에 관한 기억인 내게 그들이 지어내고 있는 광경은 실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내 안에서는 순간 많은 질문들이 올라왔다.

그들만의 행복을 위한, 그들만의 세계


 꼭 이렇게 선물을 많이 받아야만 행복한 것인가? 그냥 소박하고 작은 것을 하나씩 주면 안 되었을까? 저 넓은 거실을 꽉 채울 만큼의 선물들이 아니라면 그들은 행복할 수 없던 걸까?'

 그것들은 마치 내게, '넘치는 물질'로서만 행복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여서, '더 풍요로운 물질'만이 행복을 위한 최고의 선이라고 말하는 듯하여서,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은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듯하여서, 
나는 그 광경들이 한없이 불편하기만 하였다. 그럴까? 과연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그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였을까? 
 
 그 앞에서 행복해하는 시누이들도, 그 행복을 '베풀어주어' 뿌듯해하시는 어머님도, 내 취향이 전혀 아닌 값비싼 가죽가방 하나 달랑 사들고 온 남편도, 다 모두, 그만 보고 싶었다. 그저 그 장면 속에서 걸어나와 다른 곳에 있고만 싶었다. 나는 그 순간 행복하기는커녕, 행복을 물질과 동일시하는 저 '모두의 함의'에 참을 수 없는 저항감만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처럼 그들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크리스마스트리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인들은 저 귀한 전나무들을 싹둑 잘라 한 번 쓰고는 바로 버린다고 하였다. 실제로 크리스마스가 지나자 길에는 버려진 전나무들로 쓰레기장을 이루고 있었다. '아니, 저거 한번 하려고 멀쩡한 나무들을 다 베서 바로 버린다고?'  
 
 
당신들이 외치는 자연주의 그런 건 다 어디 간 거지?  당신들이 말하는 그 고고한 개념들은 다 어디에 있는 거지? 그들을 향한 내 안의 물음표는 자꾸 늘어만 갔다.
 
 산더미 같이 쌓여있던 과한 크리스마스 선물들도, 그 며칠을 위해 베어졌다 바로 버려지는 전나무들도, 모두 내게는 이들이 가진 어떤 '모순'처럼만 느껴졌다. 말하여지지 않은 어떤 뒷모습처럼 말이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문명의 이기, '문명인의 이기적 욕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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