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살이 극한 고독의 여정 - 이상한 똘레랑스 1편
'프랑스 정신' 하면 떠오르는 건 '자유, 평등, 박애'와 함께 널리 알려져 있는 '똘레랑스'일 것이다. Tolérance(똘레랑스)란 말은 '관용'을 뜻하는 말로, 나와 다른 타인의 생각과 사상 행동에 대해 아량을 가지고 포용하며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다양성과 다름에 대한 넓은 존중의 의미를 내포한다.
프랑스에서는 개인 간의 쟁점에서부터 종교 간의 충돌에 이르기까지 '여러 갈등 상황'의 해결책으로 똘레랑스의 가치를 적용하고 있으며, 그 방법은 주로 '토론'이나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실제로 많은 프랑스인들은 '세상의 모든 문제'는 '대화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함께 이야기하다 보면 서로의 다른 생각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러다 보면 '상대의 생각을 용인'할 수 있게 되며, 그럼으로 '보다 나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똘레랑스라는 말은 이렇듯, 말만 들어도 무언가 참 관대하고 넓은 도량을 지닌 가치만 같았다. 직접 그런 갈등 상황에 부딪혀 황망함을 겪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이가 6살이던 해, 반에 친한 친구가 하나 있었다. 아이 엄마는 피아니스트이자 유명 음대 교수였는데 늘 콘서트다 뭐다해서 집에 없는 날이 더 많았던 '바쁜 엄마'였다. 학교 체험학습이 있던 날이었다. 도우미 엄마로 자원하여 아이들과 함께 이동하던 중 나는 그 친구가 우리 아이에게 한 '부당한 행동'을 목격하였고 그 사안의 심각성 때문에 집으로 돌아와 아이와 한참을 이야기하였다. 아이 말에 의하면 그 친구는 평소에 거짓말을 잘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친구여서 아무도 놀아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문제는 그 친구가 자기를 너무 좋아해서 늘 옆에 붙어있었고 점점 자기가 다른 친구들과 놀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화를 내거나 자기를 무섭게 노려 보았다고 했다.
그게 싫었지만 그 친구가 불쌍해 보였고, 자기마저 싫다고 하면 그 친구가 마음이 아플까 봐 그냥 그 친구가 하자는 대로 해주었다고 했다. 실제로 놀이코드가 맞기는 하였다. 하지만 우리 아이는 스스로 그것이 '잘못된 우정'이라는 것을 모를 뿐 분명히 그 친구로 인해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바쁜 엄마 아빠 때문에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그 친구가, 밝고 모두와 잘 어울리는 우리 아이를 강압적으로 '지배'해서라도 '소유'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더구나 그 친구는 우리 아이보다 거의 1년이 빠른 아이였기에 더 어린 우리 아이를 손쉽게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얼마간 그렇게 하고 있었다. 처음엔 아이가 직접 친구에게 말을 해서 상황을 종결시키기를 바랐다. 아이는 그 친구에게 '그만 놀고 싶다'고 용기를 내어 말했지만 그 친구는 자신의 부당한 태도를 전혀 바꾸지 않고 있었다. 이제는 부모가 상황에 개입해서 아이를 도와줘야 했다.
그 친구 엄마를 만나 이야기를 하였다. "이런 얘기를 하게 되어 미안하지만, 당신 아이가 우리 아이를 부당하고 강압적인 방법으로 휘두르고 있었고 우리 아이는 그것으로 많이 불편해하고 힘들어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당분간 아이들을 분리시켜놓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덧붙여 말했다 "아이들이 아직 어리기 때문에 학교에서의 조력도 필요하다. 선생님에게도 도움을 요청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 엄마는 처음엔 '다 이해하는 것처럼' 말했다.
허나 다음날 그 엄마는 180 달라진 태도로 내게 '자신들의 입장을 이해해줄 것을' 읍소하였다. 심지어 아이의 친구는 '자기가 왜 가장 친한 친구와 놀 수 없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들이민 논리가 '똘레랑스'였다.
"너의 아이만 화이트고 내 아이만 블랙일 수 없다. 너의 아이 입장이 있듯이 우리 아이 입장이 있다. 지금 내 아이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우리 아이는 학교에서 친구라곤 너의 아이밖에 없는데 그럼 이제 우리 아이는 어떻게 하느냐. 우리 아이에게도 포용력을 가지고 너희들이 우리 아이 마음을 이해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똘레랑스다. 그러므로 우리가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아이들이 알아서 할 문제다. 자기들끼리 얘기를 해서 '좋은 결론'을 찾을 것이다"
처음엔 이게 무슨 논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이도 저도 아닌' 그저 '방어적 태도'라고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더구나 15살도 아니고 1년 가까이 차이 나는 6살 아이들이 알아서 얘기를 하고 스스로 '좋은 결론'을 도출한다니? 심지어 남편조차 그 말에 '일리가 있다'며 '내가 예민한 것일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였다. 주위의 다른 프랑스 엄마들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네 아이가 그런 일을 겪는 건 유감이지만 상대 친구도 어리기 때문에 그 엄마가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그 엄마의 말은,
우리 아이가 불편과 부당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놀 사람이 없는 그 친구의 입장을 '포용하고' 그 친구에게 '아량을 베풀어' 계속 함께 놀아줘야 한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지금은 '평등과 포용'을 찾을 게 아니라, 자기 아이가 부당하게 행동하여 친구 마음을 힘들게 했던 것을 반성하게 하고, 나아가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헤아려보며,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해야 맞는 거 아닐까?
그 엄마는 자기 아이의 일이 선생님에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갑자기 말을 바꾸어 철벽 같은 방어 논리를 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잘못된 것은 잘못된 거라고 말해주어야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아이는 그 친구를 '끊어내지 못해' 힘들어하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을 찾아가 일련의 상황들을 얘기한 후 도움을 요청하였다. 선생님은 내게 동감하시며 '그렇게 해야 맞는 것'이라고 하셨다.
허나 그 엄마는 내게 말 같지 않은 '똘레랑스'를 내밀었었다. 진실을 보고 싶지 않던 자신의 '두려움' 때문이다. 그것에 관대했던 남편과 다른 프랑스 엄마들의 애매한 반응 또한 '관용을 위한 관용'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반성이 수반되지 않는 관용'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프랑스식 자유의 허구
일본을 세탁해준 나라, 프랑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