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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Sep 06. 2019

설탕왕국 프랑스.
설탕으로 길러지는 아이들

유럽 살이 극한 고독의 여정 17화


 프랑스 하면 떠오르는 것은 에펠탑, 바게뜨, 그리고 맛있는 디저트 들일 것이다. 프랑스에 처음 왔을 때, 그 앙증맞고 알록달록한 미니케이크들이 그렇게 예쁘고 먹음직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종종 사 먹어보기도 했고, 유명하다는 디저트 가게들을 일부러 찾아다녀보기도 하였었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그 맛있다는 것들에 '손을 대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있었다. 내 입맛에는 너무나 달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대단한 철학을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아이라는 생명이 생겨나고 가족을 위한 음식을 만들게 되면서, 아이의 건강한 식단과 가족의 건강을 고민하게 되면서, 내게는 한 가지 커다란 철칙 같은 것이 생겨났었다. 그것은 몸도 마음도 생활도 되도록 '자연에 가깝게' 사는 것이었다.
 
 특히 아이가 '설탕'에 길들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는 처음부터 아이에게 당도가 높은 음료나 음식들을 주지 않았다. 그랬기에 우리 집에는 콜라나 환타같은 탄산음료는 물론이고 설탕이 함유된 시판 주스 같은 것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 아이는 엄마가 주는 대로 100% 착즙 과일 주스나 유기농 곡물음료 또는 보리차 등만을 마시며 자랐기에 콜라라는 존재 자체도 알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 철칙이 힘없이 무너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 곳은 프랑스였기 때문에. 
 

 아이가 3살이 안 됐을 때였다. 여느 때처럼 우리는 어머님 댁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고 아이는 사촌형제들과 함께 할머니가 차려주신 밥을 먹고 후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님은 냉장고에서 요거트를 꺼내셨다. 그리고는 모든 손주들의 요거트 그릇 안에 하얀 설탕을 큰 숟가락으로 한 숟가락씩 퍼서 수북이 얹어주셨다. 황설탕도 흑설탕도 아닌 정제된 백설탕을!
 
 나는 내 눈을 의심하였다. 허나 요거트 위에 볼록하게 솟아있던 언덕의 정체는 분명 설탕가루였다.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하였다. 우리 아이는 후식을 다 먹은 후 내게 와서 신세계를 발견한 기쁨을 전하였다. "엄마 봤어? 마미가 요거트에 설탕을 뿌려줬어! 너무 맛있었어!" 
 
 

한국에서 인기몰이중인 마카롱. 마카롱 한 개에 설탕 한 숟가락이 들어간다


 남편에게 물어보니 프랑스 아이들은 대부분 다 저렇게 요거트에 설탕을 넣어서 먹는다고 하였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어머님은 매일 아이들에게 요거트에 설탕을 '부어서' 주셨다. 아이들은 너무나 행복해했다. 이 사람들이 단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알았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싶었을 때 나는 또 다른 장면을 목격하였다. 
 
 아이들이 물을 달라고 할 때마다 어머님은 아이들에게 꼭 '시럽탄 물'을 주셨다. 설탕물이었다. 
 

 아니. 그냥 물을 주면 될 것을 왜? 나는 그게 너무 이상하였다. 프랑스에는 아이들을 위한 '시럽들'이 다양한 제품으로 있었고 어머님은 그걸 박스채로 사다 놓으신채 아이들에게 매일같이 물 대신 주셨다. 아이들은 달달한 음료 같은 물을 마시며 '할머니 최고!'같은 말들을 뱉어내었다. 그동안 쌓아놓은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어머님만의 유별난 행동이 아닌, 아이들이 있는 프랑스 가정의 일반적인 풍경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단 것과 상극인 내가 프랑스 전통 과자 마카롱이나 머랭이나 무쓰 케이크를 절대 입에 대지도 않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으나, 프랑스인들과 시댁 가족들에게 그것들은 '너무도 훌륭한 디저트이자 간식거리' 였던 것이다. 
한술 더 떠 어머님 집에서는 콜라와 아이스크림과 초콜릿은 아낌없이 잠들기 직전까지 아이들에게 공수되었다. 시댁에서는 '그 모든 것이' 용인이 되었다.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주말 잠깐도 아니고 일주일 열흘씩을 할머니 집에서 지내는데. 남편에게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했더니 "아이들이 할머니 집에 오는 즐거움" 이라며 "원래 그런 거"라고 말했다. 그래. 원래 그런 거. 당신들의 그 '전통'이구나. 시누이들도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남편도 어머님도 다들 그렇게 자랐기에 아이들에게 그리 하는 것은 '그저 당연한' 것일 뿐이었다. 심지어 남편조차 집에서 요거트를 먹을 때마다 설탕을 넣어먹으니 아이도 아빠 따라 먹겠다며 야단이었다. 어이없어 하는 나에게 남편은 '괜찮다'며 아이에게 설탕을 더 퍼서 얹어주곤 하였다. 또 다른 가치의 충돌이었다.

 더 놀라운 건 아이가 학교에 들어갔을 때였다. 프랑스는 만 3세가 되면 공교육이 시작된다. 우리 아이도 만 3살이 되던 해에 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이가 어느 날 집에 와서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엄마, 오늘 학교에서 진짜 맛있는 후식 나왔어. 요거트에 마미가 했던 것처럼 설탕을 듬뿍 뿌려서 줬어!"
 

설탕 덩어리인 프랑스 전통과자 머랭. 달걀 흰자와 설탕이 주 재료이다


 뭐라고? 나는 너무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네가 설탕을 퍼서 요거트 위에 놓은 거야?" 혹시나 하는 희망을 안고 물었다. "아니, 아줌마들이 처음부터 설탕을 가득 퍼서 줬어. 모든 친구들한테" 
아. 정말 이 나라 뭐지? 절망이 올라왔다. 심지어 학교 급식에서 요거트에 설탕을 '퍼주는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 절망감은 '단지 나의 것'이었을 뿐 그냥 그것이 '이 곳의 방식'이라는 것을 나는 무력하게 받아들여야만 했었다. 그들의 사회에 내가 속해있는 한. 

 
 그랬다. '설탕은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은 프랑스에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과다 섭취와 중독의 심각성 따위는 이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밥을 먹은 후에는 반드시 꼭 초콜릿을 몇 조각씩 먹어줘야 하는 프랑스인들에게, 과자든 케이크든 과일이든 설탕을 '부어 먹는' 프랑스인들에게, 자신들의 아이들을 설탕에 길들인 채 길러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단맛을 느꼈을 때 '행복감'을 느끼고 그것이 '긍정적인 삶의 활력'을 건네준다는 생각이 사회적 함의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혹시 그들은, 뇌의 쾌락 중추를 담당한다는 신경전달물질을 '인위적으로 공급해줘야만' 아이들이 '행복과 안정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아이들을 설탕으로 길들일 수 있을까? 
아이들은 그런 것이 없어도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거 아니었나?

   

 자연주의를 외치고 건강을 외치는 사람들. 그러나 설탕에는 너무도 관대한 사람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멀리 있는 마음'이 아닐까? 


 그들을 향한 나의 물음표는 점점 커져만 갔다.
 

 




진실을 마주한다는 것 


프랑스 똘레랑스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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