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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Sep 17. 2019

결국은 '마음'이다.
똘레랑스가 아니라

유럽 살이 극한 고독의 여정 - 이상한 똘레랑스 4편 


 이렇듯 그들이 말하는 '관용'은 내게,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것을 넘어 본질을 벗어난 듯 보일 때가 많았다. 나와 다른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좋지만 언제나 '존중'이 먼저다 보니, 상대방이 아무리 '해괴한 논리를 펼쳐도' 그 자체를 존중해줘야 하고 나아가 그러한 상대방에게까지 '한없는 관용을 베푸는 것' 이것은 무언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풀리지 않는 매듭 같은 것을 연상케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은 나의 가치 판단법에 정면으로 위배되었다. 내게는 상대의 발언이나 행동이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상대방이 신뢰를 상실할만한 행동을 했다면 나는 더 이상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없다. 말과 행동은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지만 사람 자체의 됨됨이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사람 자체에 대한 '인품'이나 '행실'보다, 그 사람이 지금 내게 건네는 '말의 내용과 태도'가 더 중요한 가치판단의 기준인 듯 보였다.
 
 그리고 아이를 힘들게 했던 학교 담임 선생님의 사례에서, 선생님은 나에게 이미 '신뢰를 상실한 사람'이었지만 남편과 다른 프랑스 엄마들에게는 '충분히 교양 있는 지성인이자 변화의 여지가 있는 사람'이라 여겨질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그들이 '계몽주의적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똘레랑스란 '이견을 가진 상대라도 서로 간의 대화를 통해 더 나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믿는 것이며,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똘레랑스 자체가 '볼테르'를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 철학자들'에 의해서 정립된 개념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남편과 프랑스 엄마들은, 부당한 행동으로 아이를 힘들게 했을지언정 그러한 상대의 입장도 '충분히 존중하여 대화하다보면 함께 좋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학습하며 성장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모든 사람이나 상황이 계몽한다 해서 나아질 수 있는 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더 솔직히는 '계몽'이라는 말 자체가 품고있는 어감도 의미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계몽주의의 토대 자체가 '이성이라는 빛으로 무지라는 어둠을 밝히자'에서 출발하므로 일단 '이성이 아닌 것'은 '타파의 대상'이 되버린다. 더구나 사람의 결정적인 행동은 그 사람의 '번지르르한 말'에서 오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의 성정과 인성의 결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우리가 겪는 갈등들은 '딱 떨어지는 논리로' 풀 수 있는 간단한 문제들이 아닌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생각들은 합리적인 '논리'로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고 선명한 '이성'으로서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아무리 '설명'을 해보았자 '너의 생각일 뿐이다' 내지는 '너의 감정일 뿐이다'라는 말들을 들어야 했고, '합리적인 근거 없이 상대를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훈계 아닌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사실은 여러 말이 필요없는 것이다. 마음 하나만 있다면


'저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너의 판단이고' '지금 저 사람은 내 앞에서 적절한 논리와 예절로서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주므로' '나는 저 사람을 굳이 배척하거나 밀어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들이 아는 관용적 논리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프랑스 사람들은 얼핏 '서로에게 호의적'으로 보인다. 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최소한 겉으로는 '예를 다하여' 경청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또한 웬만하면 그들은 '달변가'이다. 어릴 때부터 끊임없는 '토론'을 통해 논리적으로 말하는 법을 훈련하고 자신을 선명히 주장하는 것을 학습하기 때문이다. 
 
 허나 똘레랑스가 발원된 역사적 배경을 알고 나니 이들의 논리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듯도 하였다. 그 배경은 중세 유럽의 대량학살이 있던 종교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종교가 다르더라도 '극단적으로 서로를 죽이지는 말자'는 취지 같은 것과 연결되어 탄생한 개념이었다. 이처럼 
 
 '극단적인 자기 방어'에서 출발한 것이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함이 생겨난 것은 아니었을까.
 
 또한 모든 문제를 '이성에 근거한 대화로서 풀 수 있다'는 말은, 대화를 나누는 상대끼리 '사고의 출발점'이 같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너의 궤변과도 함께 갈 수 있다'는 초긍정적 수용에 대한 합의 또는 '우리는 적이 아니다'라는 초극단적 방어에 대한 합의. 그러니 그에 대한 서로의 '암묵적 합의'가 없다면 대화 자체가 성립될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종종 그 사고방식에 '동의하지 않던' 나에게는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결하기보다 '나의 직관적 판단'으로 해결하는 편이 훨씬 더 오류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남편을 비롯한 프랑스인들에게는 '합리적이지 못한 처사' 또는 '관용적이지 못한 미성숙함'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드는 생각은 이거였다
 
 이 사람들은 삶을, '합리와 논리로' 다 풀 수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아니 그렇게 믿고 있구나. 
 

 하지만 사실 모든 갈등은 '생각과 논리가 떠다니는 말'로서가 아닌 '마음'으로 푸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생각의 회로를 돌려보았자 결국, 마음의 빗장이 열려야만 되는 것이 아닐까?
  
 머리로 아무리 '그렇다'라고 해보았자, 가슴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진정한 합의'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네 삶은 '논리' 안에 가둬질만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프랑스 똘레랑스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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