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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Aug 17. 2020

프랑스 시집살이가 말해주는,
프랑스의 찐 속살


 며칠 전 한국 친구들을 만나 밥을 먹었다. 오랜만에 만나 김치전과 김치찌개를 먹으며 포근해진 마음. 프랑스인과 결혼 해 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들 이야기는 어느새, 프랑스에서 겪은 그동안의 온갖 차별담 에피소드들을 지나 프랑스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로 이어졌다. 
 
 재밌는 건 프랑스 시어머니로부터 경험한 '보이지 않는 차별과 무시'가 공통적 경험이라는 것이었다. 나름 우리도 '배운 사람들'이고 우리집 '귀한 딸'이건만, 단지 이곳에 시집왔다는 이유만으로 바로 '열등한 아시안'이라는 보이지 않는 이름표가 붙어 버린 당황스런 상황. 그것은 '경단녀'나 '부엌데기'라는 무기력을 뛰어넘는 또 다른 장막이었고, 오래도록 우리를 생활 속에서 짓누른 '벽'이었다. 오직 '아시아 여자'라는 이유가 아니라면 납득되지 않는 차별이라는 결론이었다.
 
 좋은 대학 나와 번듯한 회사에 다녔던 한 친구는, 이곳에 와 불어를 처음부터 배우며 인생을 다시 '리셋'해야 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 나라 말을 익히고 내 돈으로 돌을 벌 수 있게 되기까지, 비록 그것이 한국에서 하던 '화이트 칼라' 일이 아니었어도 그제야 숨을 쉴 거 같았다고 했다. 그 모든 힘듦 중 가장 힘들었던 건 프랑스 시어머니와의 갈등이었다. '귀한 외아들'이 외벌이 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그녀의 시어머님은, 어느 날 그녀 손목을 붙잡고 다짜고짜 맥도날드에 데려갔었다고 한다. 그게 뭐든 '돈을 벌라'는 말이었다. 그 순간 그녀는 얼마나 기가 막혔으며 스스로가 얼마나 초라하게 느껴졌을까. 그녀는 식당일부터 시작해서 제빵사까지 정말 많은 일을 전전하였다.
 

 또 다른 친구는 순수 예술을 하던 친구다. 시댁은 평범한 집이었고 남편의 경제력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웠다. 친구는 예술인이라는 이름표를 떼어내고 생업 전선에 나서야 했다. 전문 기술이 없던 친구가 어린아이를 키우며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마트의 캐셔를 하고, 몸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했다. 그러나 그 친구 역시 시어머니 운은 없었다. 이국 만리 타향살이하는 며느리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 안쓰러워서라도 잘해주고 싶을 것 같은데, 그녀의 시어머니는 처음부터 그녀가 싫은 티를 대 놓고 냈다고 한다. 그 모든 거침없는 무례한 행동들을 겪으며 그녀가 느낀 것은 한 가지였다. '내가 백인이었거나 유럽인이었대도 저렇게 했을까' 그녀는 얼마 전부터 시어머니를 안 보고 살고 있다.


프랑스가 식민지를 점령할 때마다, 프랑스인들에게 소개되었던 '프랑스 이미지' - "프랑스는 모로코에 문명과 부와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1911년 발행된 프랑스 신문 

 

 어쩌면 하나같이 내 마음을 보는 것 같을까. 나는 그것도 신기했고 웃음마저 나왔다. 그녀들의 시어머니도 내 시어머님도 모두, 밖에서는 모두가 '좋은 사람'으로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모든 이웃과 모든 이들에게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그녀들이 그렇게 돌변할 때는 딱 한 순간뿐이다. '아시아 며느리를 마주하고 있을 때'. 그렇기에 실은 누구도 그녀들이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알 수 없다. 오직 그들 앞의 며느리들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이 얼마나 은밀한 억울함이며 드러나지 않는 서러움인가. 실은 바로 옆에 있는 프랑스인 남편들마저, 그 묘하고 싸늘한 기운을 눈치 채지 못한다는 것이 핵심이니 말이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이것이다. 누가 그녀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었을까.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프랑스도 아니고 프랑스 사회도 아니다. 그러나 명확한 건, 프랑스와 프랑스 사회는 절대로 그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사회가 함의하고 있는 생각들, 이 사회 구성원들이 오래전부터 지녀오고 있던 마음들에 분명히 그러한 생각들이 녹아 있기에 발생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이 땅의 구석구석, 세밀한 촉수의 끝에서마저 이러한 일들이 끊임없이 생겨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프랑스인들 무의식에 뿌리 깊이 자리하고 있는 하나의 '견고한 사고'로부터 온 것일 수밖에 없다. 바로 4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들의 '제국주의적 본성'이다.
 

 물론 그 행위의 시작은 이 사회의 엘리트들이었으나, 그들이 설계한 모든 '정신적 가치'에는 분명 '제국주의 정당화를 위한' 프로파간다들이 포진해 있었다. 거기에는 가장 강력한 선전 도구이자 세뇌 장치인 '교육'이 포함된다. 바로 '스스로를 우월한 인종으로 믿게 하기 위한' 교육이, 그들 역사와 문화와 모든 것에 침투해있는 것이다. 그 견고하고 꾸준한 주입의 결과를 오늘날 우리는 목도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많은 이 땅의 사람들이, 그것도 배운 사람들이, 그것이 차별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는 것. 우리가 겪었고 겪고 있는 이 땅에서의 차별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그 지점이기 때문이다.


"번영, 문명, 상업"이라는 '간판'을 들고 식민지에 강림하신, '강인하고 아름다운 여신 프랑스'. 실제 프랑스는 당시 이런 류의 포스터를 무수히 만들어 자국민에게 배포하였다. 

 
 세뇌가 빛을 발하는 순간은 언제나, 의식적 순간이 아닌 무의식적 순간이다. 그리고 그 무의식적 행동이 그 사람의 결정적인 본모습이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건, 이성과 합리가 아닌 무의식에 축적된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말해준다 한들 알까. 이해할 수 있을까. 완전히 반대 입장이 되어 며느리의 심리적 고충에 공감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공감능력이란 상대가 '나와 평등한 존재'라는 전제하게 생기는 것이지, '우월한 나'와 '열등한 너'라는 수직적 사고에서는 절대 생겨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프랑스 시어머니들이 그러는 것은 아니다. 진실된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사는 행복한 며느리들도 당연히 많이 있을 터이다. 그러나 그런 며느리들은 필시 ‘밥벌이를 제대로 해 오는’ 며느리들일 가능성이 높다. 프랑스 사회에 완벽하게 녹아들어 완전한 프랑스인으로 기능하는 사람들. 거기에 육체노동이 아닌 우아한 경제 활동까지 떳떳이 하고 있다면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더욱 만족스럽다.  
 

 분명한 건, 위에 언급한 사례들이 이 사회에 적지 않게 포진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개인적 소행이라기엔 너무나 보편적으로 한결같은 이유를 지녔다. 그 누구도 절대 그거라고 말하지 않지만 차별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명백하게 그거라 느껴지는 것.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마음으로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 그러한 순간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필시 ‘균일한 마음’이 들어간 행동이다. 그리고 서러움을 당한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그것의 사실 여부를 증명한다. 그 감정은 그 마음이 일으킨 작용으로 생긴 결과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백인 남편과 결혼한 콩고 친구 역시 시댁에 가는 것이 불편하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모두에게 좋은 분'인 그녀의 시아버님이 매번 그녀를 향해 보내는 그 눈빛과 공기를. 또다른 프랑스 친구는 반대로, 아프리카 남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프랑스 가족들에게 단교를 당한 채 살고 있다. 프랑스에 거주하시며 변호사로 오래 활동하고 계시는 한국분의 말씀이 떠올랐다. 프랑스 이주 여성 99%가 인종차별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다고. 수치가 주는 팩트에 다시한번 마음이 아팠다. 


프랑스 극우정치인 '마린 르펜'의 연설장. 실제 프랑스 식민지에서 군생활을 했고 선명한 인종차별주의자인 그녀의 얼굴이, 프랑스의 그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듯하다.

 
 그리고 우리는 보았다. 지난 2년간의 프랑스의 코로나 실상을. 봉쇄가 끝나고 코로나도 같이 끝났다고 여기는 듯한 프랑스인들의 한탄스러운 인식을 보면 당연한 듯 보여진다.
"우리는 프랑스인이기 때문에, 삶을 사랑하고, 웃고 포옹하고 비쥬를 사랑한다" 말하며 여전히 마스크를 쓰지 않고 다녔던 사람들.  
 
 이러한 인식. 이런 생각 자체가 모순적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없는 인식. 그러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 이방인 며느리들은 오늘도, ‘우월한 프랑스인’이라는 그들의 ‘견고한 명제’ 속에서 보이지 않는 차별을 겪고 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현실인가. 







프랑스는 '정통' 제국주의 국가다


필자가 경험한 '프랑스 인종차별'


* 참고 자료 : < Le Petit Journal > 은 1863년부터 1944년까지(프랑스 제국주의가 한창이던 시절) 프랑스에서 발행된 보수적인 신문으로 '프랑스 4대 일간지' 중 하나였음. 영문 위키 참고 http://bitly.kr/gWZeCI4K3yP프랑스 니스 노마스크 파티, KBS 취재 영상 (20:20분부터) http://bitly.kr/CZDJjsn0O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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