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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Sep 16. 2019

위험한 똘레랑스.
본질을 벗어난 '관용'

유럽 살이 극한 고독의 여정 - 이상한 똘레랑스 3편


 아이가 학교를 바꿔달라고 말하기 시작한 어느 날, 담임 선생님과 학교장, 남편 이렇세 넷이서 아이 문제를 상담하기로 하고 학교를 찾았다.
 
 그 둘은 예상대로 말끝마다 '미소지으며' '당신들의 뜻도 존중합니다'라 말하는 우리 남편을 '설득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진작 말하지 그랬냐. 앞으로 내가 아이와 대화도 더 많이 하고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겠다. 그러다 보면  아이의 마음도 누그러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말들을 반복하였다. 예의 그 '차분하고 우아한 미소와 적절한 유머를 섞어서'
 
 하지만 이미 권력의 추가 기울어져있는 '선생님'과 '학생'이라는 입장에서 '동등한 대화와 소통'이 앞으로는 가능하다고 말하는 선생님의 말은 내게 '교과서를 읊는 앵무새'처럼 공허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리고 정작 아이는 선생의 '폭력적 권력'에 상처 받은 상태였음에도 '아이의 마음'보다는 '자신의 방식'이 오해로 받아들여질 수 있음에 대하여 '열린 자세로 이해해줄 것을 요구'하는 듯 보였다.
 
 나는 일단 얘기를 다 들어준 다음 선생님께 말하였다. "네. 선생님 말씀대로 '대화를 하다 보면' 좋아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모든 것이 꼭 대화로 좋아질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아요. 죄송하지만 이미 제 아이의 마음속에서 선생님은 '모멸감을 안겨준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었어요. 새 학년 초에 아이를 크게 혼내셨던 그 날에요. 그렇기에 아이는 그 순간 이후로 선생님을 마음속에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계속 아이는 고통스러워했고 지금도 그러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학교를 바꿔야겠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선생님과 교장은 그 순간 우리에게 자기변명을 위한 '거짓말들'을 여전히 '미소와 유머를 섞어 우아하게' 늘어놓았고, 자세한 모든 것까지 다 알지 못하는 남편 역시 때론 친절한 미소로 그들을 응대해주고 있었다. 
상담은 결국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끝을 맺었고, 우리는 '그럼에도 아이와 다시 얘기해보고 결정하겠다' 말하며 그 자리를 나왔다. 하지만 상담 자리에서 분명 그들을 향해 '선생님이 아이에게 자주 소리 지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던 남편이 학교를 나서며 나에게 

'그럼에도 대화로 해결하는 것이 맞다. 선생님의 입장도 존중해주어야 하며 선생님과 대화하다 보면 아이도 좋아질 수 있을 것이다
'며 자기는 '학교를 바꾸지 않겠다'라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가슴이 꽉 막혀왔다. 오매불망 학교 바꿔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아이는 너무 실망한 나머지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가 정신적으로 힘들 만큼 괴로워하고 있고, 선생님이 매일같이 심하게 소리를 질러대는 것은 아이들에게 분명한 폭력임에도, 불필요하게 엄하게 하는 것은 아이들을 갉아먹는 것임에도, 
 
 
남편은 그것보다는 '상대방과 대화하다 보면 좋아질 수 있다는 어떤 신념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해 보였다그것은 선명하게 '똘레랑스의 위험한 함정'이었고 본질을 벗어난 방향이었다. 
 

겁먹은 자들에게 언제든 '방패'가 되어줄 수 있는 '그들만의 똘레랑스'


 프랑스 엄마들과 남편의 논리는 '우리 아이의 고통을 이해하지만, 상대방의 아이 마음과 상대방인 담임 선생님 입장도 똑같이 중요하므로, 누구를 잘못했다고 말할 수 없으며, '함께 대화하다 보면' 서로의 오해가 풀리고 다시 서로가 어울려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관용의 마음을 가지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다 하여 모든 상황과 기준에서 '관용'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론 '불관용의 법칙'이 필요함은 당사자가 관용 없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관용이 적용될 수 없는 상황'에서의 가치판단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더구나 나는 상대방의 합리화에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다 이해합니다. 그러니 앞으로 잘 지냅시다' 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대개의 갈등이나 상처들은 '미소로 마무리되면 그만인' 것들로 끝내면 안 되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이미 '이성의 영역'을 넘어선 '감정과 마음에서 온 것들'이기에 그렇다. 그 감정이 발현된 지점으로 돌아가 그 핵심을 명확히 보지 않으면 갈등은 봉합될 수 없다. 그렇기에 나에게,
 
 이들의 '미소로 퉁쳐버리는 결말'은, '진실을 마주하려 하지 않는 마음들'이 만나 상처를 서둘러 '봉합'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똘레랑스를 말하지만 내게는, 상처를 벌려 소독약을 바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마치 '겁먹은 아이'처럼.

 
 그렇듯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태도' 그리고 '서로 얼굴 붉히지 않으려는 마음' 결국 그것은 문제를 직시할 수 없게 하고 반성해야 할 행위에 오히려 힘을 실어줄 뿐이었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 여러 프랑스인들을 겪으며 알게 되었다. 그들의 이러한 '논리'와 '귀결'은 그들의 '솔직하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에서 비롯된 어떤 것이라는 것을. 그것은 그들이 속마음과 다른 '친절한 미소를 늘 띠고 있는 것'과 같은 결을 가진 것이라는 것을. 그랬기에 그것은 결국  
 
 그때 그 친구의 엄마도 아이의 담임 선생님도, '진정한 반성' 없이 '관용'이라는 모호한 말 아래 숨어 자신들 입장을 정당화 시키는 처량한 오류를 범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밑거름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한 똘레랑스라면 나에겐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가진 신념'이라는 '또 다른 권위'로부터 우리 아이를 지켜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 땅의 거의 모두가 '그렇다'고 하는 것과 '반대되는 방향'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켜야 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이기적인 자유'

 
프랑스의 진실을, 직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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