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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소년이 온다'

'평범함 뒤에 숨은 잔인함, 영혼의 상처, 영원한 상실'

by 한나Kim

'소년이 온다'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책이다. 내 고등학교 시절에는 현대사를 배우지 않았기에, 5.18 민주화운동은 사실 나에게는 꽤 낯선 주제였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그것은 나에게 그저 '지나버린 과거'였을 뿐이다.


그러다가 세상이 조금씩 변하며 5.18 민주화운동을 다루는 미디어가 많아지면서, 이전보다는 더 또렷한 시각을 갖게 되었다. 대중의 본격적인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아마 2017년,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택시운전사'가 개봉하면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나 또한 영화를 본 후,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픽션일까 궁금해서 이것저것 찾아봤던 게 기억난다.


이렇게 흐릿했던 그림에서 조금씩 또렷한 사진으로 변화되는 시점에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가 노벨상을 받은 것이다. 그것도 아시아 여성 최초로 말이다.



......



이 책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나온다. 너무나 평범한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공장에서 일하는 누나, 누군가의 엄마. 그리고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사람들. 가해자, 피해자를 구분 짓지 않고, 이 책에 등장하는 모두가 우리의 평범한 이웃이고, 내 친구이며,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치는 누군가인 것이다.


이렇게 겉으로는 평화롭고 온화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존엄성을 침해당한 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은 상처와 의문을 안은 채 살아가게 된다.



1. 평범함 뒤에 숨겨진 사람들


P70

어떻게 첫 뺨을 잊을까.

처음에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사무적인 일을 앞둔 사람처럼 침착하던 사내의 눈을.

그가 손을 쳐들었을 때, 설마 때리는 건가, 생각하며 앉아 있었던 그녀 자신을.

목뼈가 어긋난 것 같았던 첫 충격을.


P75

그런데 그 손은 보통의 남자들보다 작은 편이지 않았나.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손, 특별히 크지도 두껍지도 않은 손이지 않았나.


P77

얼굴은 어떻게 내면을 숨기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어떻게 무감각을, 잔인성을, 살인을 숨기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책의 주인공인 '너'(동호)는 16살이다. 그는 자신의 친구인 정대의 시신을 찾기 위해 도청에 왔다가 그곳에서 일손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고, 시신의 이름과 관 번호를 붙이는 일을 담당하게 된다. 시체가 부패하는 장면을 읽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그런 괴로운 일을 자발적으로 하는 어린 '너'를 보며 무엇이 그를 이렇게 용기 있게 만든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2. '너'를 최초로 움직였던 힘


사라진 정대는 동호의 집에 세 들어 살던 동갑내기 친구였고, 둘은 늘 함께였다.


P35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대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은 정대를 생각했다. 여태 초등학생같이 키가 안 자란 정대. 그래서 정미 누나가 빠듯한 형편에도 우유를 배달시켜 먹이는 정대. 정미 누나와 친남매가 맞나 싶게 못생긴 정대. 단춧구멍 같은 눈에 콧잔등이 번번한 정대. 그런데도 귀염성이 있어서, 그 코를 찡그리며 웃는 모습만으로 누구든 웃겨버리는 정대. 소풍날 장기자랑에선 복어같이 뺨을 부풀리며 디스코를 춰서, 무서운 담임까지 폭소를 터뜨리게 한 정대. 공부보다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정대. 누나 때문에 할 수 없이 인문계고 입시 준비를 하는 정대. 누나 몰래 신문 수금 일을 하는 정대. 초겨울부터 볼이 빨갛게 트고 손등에 흉한 사마귀가 돋는 정대. 너와 마당에서 배드민턴을 칠 때, 제가 무슨 국가 대표라고 스매싱만 하는 정대.



그를 행동하게 만든 것은 이런 두터운 우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를 그곳으로 이끈 것은 사실 죄책감이었다. 그로부터 도망쳤다는 죄책감, 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맨발을 꿈틀거리는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는 죄책감. 죽음보다 두려웠던 그의 죄책감이, 결국 자신을 죽음으로 몬 것이다.


P31, 32

처음 누나들을 만났을 때 네가 한 말 중 사실이 아닌 게 있었다.

역전에서 총을 맞은 두 남자의 시신이 리어카에 실려 시위대의 맨 앞에서 행진했던 날, 중절모를 쓴 노인부터 열두어 살의 아이들, 색색의 양산을 쓴 여자들까지 인산인해를 이뤘던 저 광장에서, 마지막으로 정대를 본 건 동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너였다. 모습만 본 게 아니라, 옆구리에 총을 맞는 것까지 봤다. 아니, 정대와 너는 처음부터 손을 맞잡고 선두로, 선두의 열기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귀를 찢는 총소리에 모두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

너는 눈을 가늘게 뜨고 거리 가운데 쓰러진 수십 명의 사람들을 봤다. 네가 입은 것과 똑같은 하늘색 체육복 바지가 얼핏 보인 것 같았다. 운동화가 벗겨진 맨발이 꿈틀거린 것 같았다. 네가 뛰쳐나가려는 순간, 입을 막고 떨던 아저씨가 네 어깨를 붙들었다. ...

지금 나가면 개죽음이여.


P35

정적 속에서 너는 정대의 얼굴을 떠올렸다. 연한 하늘색 체육복 바지가 꿈틀거리던 모습을 기억한 순간, 불덩어리가 명치를 막은 것같이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P36

어두워지는 텅 빈 방 가운데 서서 너는 마른 눈두덩을 손등으로 비볐다. 뜨겁게 살이 일어날 때까지 비볐다. 정대의 책상 앞에 앉아 보았다가, 차가운 방바닥에 얼굴을 대고 엎드렸다. 고통이 느껴지는 가슴뼈 가운데 오목한 곳을 주먹으로 눌렀다. 지금 정미 누나가 갑자기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달려 나가 무릎을 꿇을 텐데. 같이 도청 앞으로 가서 정대를 찾자고 할 텐데. 그러고도 네가 친구냐.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야. 정미 누나가 너를 때리는 대로 얻어맞을 텐데. 얻어맞으면서 용서를 빌 텐데.



행동하지 않은 자들에게도 죄책감이 남아, 그들을 평생 괴롭혔다. 동호의 엄마가 그러했듯이.


P42

군대가 들어온단다. 지금 집에 가자이.

억센 엄마의 손가락을 마침내 다 떼어냈다. 너는 날쌔게 강당 안으로 도망친다. 뒤따라 들어오려는 엄마를, 집으로 관을 옮겨가려는 유족들의 행렬이 가로막는다.

여섯 시에 여기 문 닫는대요 엄마. ... 문 닫으면 나도 들어갈라고요.

엄마의 얼굴이 그제야 펴진다. 꼭 그래라이. 그녀가 말한다. 해 지기 전에 와라이. 다 같이 저녁밥 묵게.


P184

마지막 날에 내가 너를 찾아갔을 적에, 네가 그리 순하게 저녁에 들어갈라요, 말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으까이. 나는 안심을 하고 집에 가서 느이 아부지한테 그랬어야.

여섯 시에 문 잠그고 집에 온다요. 다 같이 저녁 묵자고 약속했소.

그란디 일곱 시가 되도록 네가 안 들어온게, 느이 작은형하고 나하고 둘이서 집을 나섰다이. ...

그 시민군들은 파랗게 얼굴이 굳어갖고 안된다고, 아무도 들여보내면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더라이. ...

제발 들어가게 해주소, 하고 나는 빌었어야.

우리 막내 불러라도 주소. 잠깐만 나와보라고 해주소.

보다 못한 느이 작은형이 직접 들어가서 동생을 찾겄다고 한게 시민군 하나가 그러더라이.

지금 들어가면 못 나옵니다. 저 안에는 죽을 각오가 된 사람들만 남았습니다.

느이 작은형이 알겄다고, 일단 들어가게만 해달라고 언성을 높일 적에 내가 말을 막았다이.

그 아그가 기회를 봐서 제 발로 나올라는 것이여.... 분명히 나한테 약속을 했단게.

사방이 너무 캄캄해서 내가 그렇게 말을 했다이. 금방이라도 어둠 속에서 군인들이 나타날 것 같아서 그렇게 말을 했다이. 이라다가 남은 아들까장 잃어버릴 것 같아서 그렇게 말을 했다이.

그렇게 너를 영영 잃어버렸다이.





그렇다면 다른 이들은 어떨까? 목숨을 버릴 각오로 행동했던 사람들. 은숙, 진수, 선주는 무엇 때문에 그런 용기 있는 행동에 나선 것일까? 그들을 행동하게 만든 것은 동호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들을 움직인 것은 인간 본연의 모습인 '양심'이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했던 마음, 남아있는 이를 살리고자 했던 고귀한 마음 말이다.



3.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양심.


P114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P116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그날 도청에 남은 어린 친구들도 아마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겁니다. 그 양심의 보석을 죽음과 맞바꿔도 좋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그렇게 그들은 목숨도 아깝지 않다 생각하면서 양심을 따랐다. 그러나, 그렇게 고결했던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존엄성도 아니요, 고결함도 아닌, 영혼의 상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깨끗한 영혼이 밥 한 끼에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인간에게 존엄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4. 존엄성의 상실


P118-119

김진수와 나는 여전히 식판 하나를 받아 한 줌의 식사를 나눠 먹었습니다. 몇 시간 전에 조사실에서 겪은 것들을 뒤로하고, 밥알 하나, 김치 한쪽을 두고 짐승처럼 싸우지 않기 위해 인내하며 묵묵히 숟가락질을 했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식판을 내려놓고 소리쳤습니다. 참을 만큼 참았어. 그렇게 네가 다 처먹으면 난 어쩌란 말이야. 으르렁 거리는 그들 사이로 몸을 밀어 넣으며 한 남자애가 더듬더듬 말했습니다. 그, 그러지 마요. 좀처럼 입을 떼지 않는, 늘 주눅 든 듯 조용한 아이였기에 나는 놀랐습니다.

우, 우리는...... 주, 죽을 가, 각오를 했었잖아요.

김진수의 공허한 눈이 내 눈과 마주친 것은 그때였습니다.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 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 주겠다.


P134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 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P174

그들이 욕설을 뱉으며 당신의 몸에 물을 끼얹던 순간을 등지고 여기까지 왔다.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졌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결국 남은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공허한 외침뿐이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떠나버린 영혼을 위한 외침, 양심적으로 행동했던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한 행동. 그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5. 남은 자들의 공허한 외침


P189

우리하고 다른 곳에서 시위하기로 했던 부상자회 청년들이 잡혀들어왔다이. 시무룩이 줄을 서서 들어오다가 우리하고 눈이 마주쳤는디, 한 청년이 갑자기 울면서 소리쳤다이.

엄마들, 여기서 왜 이러고 있소? 엄마들이 무슨 죄를 지었소?

그 순간 내 머릿속이 멍해졌어야. 하얗게, 온 세상이 하얗게 보였어야. 찢어진 소복 치마를 걷고 탁자 위로 올라갔다이. 더듬더듬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렸어야.

맞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단가.

날개가 달린 것같이 형사들 책상 위를 겅중겅중 건너갔다이. 벽에 걸린 살인자 사진을 끌어내렸다이. 밟아 부순게 발에 유리가 박혔다이. 눈물이 흐르는지 피가 튀는지도 몰랐다이.


P190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렇게 만나 싸웠다이. 헤어질 적마다 엄마들끼리 서로 손을 잡고 어깨를 쓸고, 눈을 들여다봄스로 다시 보자고 약속을 했다이. 없는 살림에 추렴을 해서 전세 버스를 맞추고 서울 집회에도 올라갔다이. 한 번은 모진 놈들이 우리 버스 안에 사과탄을 던져 넣어서 한 엄마가 숨을 못 쉬고 쓰러졌어야.



.......



책을 읽으며, 여전히 영혼을 잃은 채 살아가고 있을 이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책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P99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결국, 문이 열린 새장 안에서도 훨훨 날아가지 못하고 그들을 자리에 주저앉게 만든 것은 그날의 '잔인함'이 아니었다.

그들을 가둔 것은 익명성에 숨겨진 진실이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이름도 시신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야 했던 죽음, 당한 일을 당했다고 말조차 하지 못했던 역사 속의 폭력, 그리고 "무엇이 문제니? 이미 지나버린 과거잖아. 이제는 그만 잊어"라고 생각 없이 내뱉었던 말들. 이 모든 것이 그들을 날지 못하게 만든 진짜 철창이었던 것이다.


이젠 잊자고, 그냥 덮어버리자고 가볍게 말하던 나 자신을 반성한다.


P161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당신은 자신에게 물은 적 있다. 모든 게 지나갔지 않은가. 당신에게 고통을 줄 가능성이 백분의 일, 천분의 일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당신 스스로 깨끗이 밀어냈지 않나.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니,라고 묻던 성희 언니의 침착한 목소리를 당신은 기억한다.



.....



역사는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진정한 과거로 만들기 위해서는, 당시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변명 없이 투명하게 반성한 뒤, 상처 입은 이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모든 것이 정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인정–반성–사과’, 이 세 가지야말로 세상의 모든 혼란을 정화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방식이 아닐까. 그 과정을 거친 뒤에야 우리는 찬란한 미래를 기대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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