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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

'슬픔도 기쁨도 사랑도 이별도 결국 삶의 일부분'

by 한나Kim

인간이 삶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과연 어떤 생각들이 떠오를까? 가끔 그런 상상을 해본다. 소중한 마지막 순간에 나를 배신했던 사람이 떠올라 괴로울까? 나를 힘들게 했던 이들이 생각나며 여전히 증오심이 피어오를까? 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인생의 마지막에는, 내가 겪어온 모든 경험, 심지어 나를 아프게 했던 일조차, 그저 아름다웠다고,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될 것 같다.


프로데 그뤼텐의 '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는 그런 궁금증을 해소해 주는 책이 아닐까 싶다.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인간이 각자 겪어온 삶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감정 표현이 적은 북유럽, 특히 노르웨이 사람이라서인지,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하고 건조하게 흘러간다. 묘사가 많지도 않고, 감정도 절제되어 있으며, 설명조차 거의 없다. 책 안에 비어 있는 여백이 많아 ‘지금 내가 제대로 읽고 있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런 의문을 품은 채 계속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아!’ 하고 마음을 울리는 깨달음이 찾아온다. 다시 말해, 글의 초반보다는 중반과 후반으로 갈수록 ‘인생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잔잔한 감동이 밀려온다.


이 책의 주인공 '닐스 비크'는 피오르(Fjord) 양옆에 자리한 도시와 섬마을을 이어주는 페리 운전수이다. 그는 평생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섬에서 도시로, 또 도시에서 섬으로 날랐다.


묵묵히 자기 일만 하던 그가, 죽음을 앞둔 마지막 날에 페리를 운행하며 그가 만났던 사람들의 삶을 담담히 회상한다. 그리고 그가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이미 죽은 이들을 페리에 태우며 이야기도 나눈다. 이 서사가 초반에는 혼란스러웠다. 그가 마지막으로 페리를 운전한 뒤,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는 걸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죽은 이들을 태우는 장면을 읽는 순간, '아, 그가 이미 죽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실제로 죽은 것인지, 아니면 혼수상태에서 죽은 자들을 만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책을 읽어가다 보면 혼란스러움이 없어지면서, 삶과 죽음이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아니라 하나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삶과 죽음, 죽은 이들과 살아 있는 자들의 서사, 그리고 피오르라는 거대한 자연. 이 모든 요소가 결국 하나로 이어지며 읽는 내내 채워지지 않았던 책의 빈 공간을 묵직하게 메워준다.


닐스가 들려주는 개개인의 삶에는 아름다움뿐 아니라 잔인함, 부끄러움, 괴로움, 배신, 사랑, 생명의 탄생, 그리고 죽음까지, 우리가 겪고 판단하는 모든 감정이 담겨 있다. 그렇게 각자의 짧은 인생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문득 깨닫게 된다. 그들의 삶에는 부끄러움도, 괴로움도, 배신도, 잔인함도 결국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이 모든 것이 단지 그들의 삶을 이끈 하나의 경험이었구나 하는 울림이 조용히 스며든다.



P89

닐스 비크의 배를 타고 그 중요한 날을 맞이한 커플은 누가 있었을까? 그 수는 적지 않았다. 아스트리드 네스와 페데르 우트베르는 1958년 6월, 그의 일지에 적힌 대로 햇살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날 결혼식을 올렸다.

시르스티 레이세테르와 얀 비벨리드도 그의 배에 탔던 커플이었다. 두 사람은 1961년 성탄절 무렵에 결혼했다. 그들은 원래 비카의 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으나, 나이 많은 목사는 그들이 너무 일찍 잠자리를 함께했다는 이유를 들어 주례를 거부했다.

요한나 야콥스도테르와 할도르 비크네 커플도 있었다. 신랑의 얼굴 한쪽과 목 아래에는 심한 화상 자국이 있었다. 할도르는 끓는 물을 덮어쓰는 사고를 당했다. 피오르에 사는 사람들은 할도르가 평생 결혼을 못 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할도르의 아내는 화상으로 인한 상처는 단지 외적인 면일뿐, 자신은 거기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르기트 에스페와 크누트 하브레는 1968년에 결혼했고, 그로부터 몇 년 후 크누트는 AG-3 소총을 사용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P137-9

그녀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며 닐스에게 쇼핑 리스트를 건넸고, 그가 그 물건들을 사서 매주 월요일마다 브루순데로 실어다 주면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닐스는 전혀 문제없으며, 원한다면 집까지 물건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마침내 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숨을 내쉬었다. 올해 겨울은 내 삶의 마지막 겨울이 될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닐스는 잠시 침묵하다가 매주 월요일마다 구매한 물건들을 그녀의 집까지 배달한다면 그녀를 볼 수 있어 더 좋을 것이라고 말했고, 그녀의 건강이 악화되어 참으로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삶이 있고, 그 삶은 언젠가 끝이 나기 마련이에요. 카리가 말했다.

그녀는 모든 위선과 거짓된 배려를 참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혼자 죽고 싶으며, 자신의 병약한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모습으로 기억되는 것도 싫다고 했다. 그녀는 닐스에게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 그녀는 닐스가 새롭게 구매한 물건들을 가져왔을 때 이전의 물건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 있다면, 그건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P162-3

닐스는 로버트 소트를 처음 본 날부터 좋아했고, 어디선가 갑자기 불쑥 나타난 그를 주저 없이 배에 태웠다. ... 닐스는 로버트를 거두어들였고, 그를 받아들였으며, 그가 뿌리를 내리고 정착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었다. 일지 어딘가에 닐스는 이렇게 적었다. 그런 친구는 두 명이 있을 수 없다. 그런 친구는 인생에서 딱 한 번 만날 수 있다.


P167-8

닐스는 로버트가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던 일요일을 떠올렸다. 유난히 날씨가 좋은 여름날이었다. 그들은 배를 타고 산되위섬으로 가서 맥주를 마시고 구운 소시지를 먹었다. 마르타와 닐스의 두 딸도 함께 갔다.

얼마나 오래 머무를 건가요? 닐스가 물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로버트가 대답했다.

그럼 언제 돌아올 생각인가요?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마르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해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팔짱을 낀 그 모습을 보고 닐스는 그녀가 화를 삭이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

그녀를 사랑했나요? 닐스가 물었다. 로버트는 대답하기 전에 한참 뜸을 들였다.

마르타 말인가요?

네. 당신은 마르타를 사랑했나요?

네, 나는 그녀를 사랑했어요.

확실한가요?

물론 확신할 수는 없어요.

당신이 떠났던 것은 그 때문이었나요?

로버트는 침묵했다. 닐스는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요, 닐스.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네. 나는 걱정할 만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떠났어요.

당신은 한 가정을 파괴하려고 했어요.

내가요? 그건 아니에요. 나는 오히려 당신의 가족을 구하려고 노력했어요. 바로 그 때문에 짐을 싸서 떠났던 것이랍니다.

...

고맙군요. 하지만 그녀는 내 여자였어요. 나의 아내. 내 사람이었다고요.

내가 가장 잘 기억하고 있는 것도 그거예요, 닐스. 다른 사람을 원하는 것, 낯선 살갗을 갈망하는 것, 잠옷 차림 또는 벌거벗은 채로 벽에 기대어 있는 그녀를 상상하는 것.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우리가 무엇을 공유했나요?

미르타. 우리는 둘 다 마르타를 사랑했어요.

그들은 한동안 침묵했다. 닐스는 로버트에게 한 발짝 다가가 두 팔로 그를 감싸 안았다. 미국인은 닐스의 손에서 벗어나며 선실에 누워 잠시 쉬고 싶다고 말했다. 죽은 자의 삶을 산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거든요.



P230-1

닐스는 속도를 늦추고 후진을 해서 호텔 옆 부두에 배를 정박시켰다. 배에 오른 이바르는 마치 피를 나눈 형제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상한 눈빛으로 닐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곧 어둠 속으로 사라질 그림자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 이바르가 말했다.

뭐가?

나를 묻어줘서 고마워. 난 형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그때 내가 물어봤던 기억나?

뭐라고 물었지?

나를 땅에 묻어줄 수 있냐고 물었었지. 형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어. 그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겠다고. 아무 문제없다고. 꼭 나를 땅에 묻어주겠다고 말했어.

이바르는 마치 함께 섞여 흐르기 시작하는 이 세상과 저세상처럼 이전과 같은 사람이면서도 다른 존재였다.


P244-5

승강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지만 안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동생이 아직도 자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1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그는 동생과 함께 배를 타게 된다면 아침마다 그를 깨우는 일로 전쟁을 치를 것이라 생각했다. 닐스는 대문을 살짝 밀어보았다. 대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현관에는 이바르의 고양이가 머리에 총을 맞고 혀를 쑥 뺀 채 널브러져 있었다. 이바르는 잘 꾸며진 거실 소파에 뻣뻣하게 앉아 있었고, 주변은 피로 흥건했다. 쿠션과 벽에도 핏자국이 있었다. 이바르의 목은 뒤로 젖혀져 있었다. 마치 자신의 삶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대책 없는지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듯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P268

그는 이제서야 모든 것을 깨달았고 전체적인 그림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세상에 태어나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여기까지 왔다.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바람과 바다와 땅, 미움과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살았던 데 감사하고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삶은 끝없는 초안과 스케치이며, 적응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자 과거와 변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일단 시작된 이야기를 마음대로 바꿀 수 없으며, 좋든 싫든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따라가야 한다.


...


이 책을 읽으면서 가끔씩 우리 집에 오는 Traveling Teacher 중 하나였던 폴란드인 Artur가 했던 법문이 떠올랐다. 주제가 What is Buddha's nature?(불성이란 무엇인가) 였는데, 그의 설명과 이 책의 내용이 완벽히 일치함을 느껴 공유하고 싶다. * Buddha's nature: 불성(부처님의 본성)



What is Buddha's nature?

It is an ability to experience.

그것은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인간은 태어나고, 처음으로 울고, 처음 걸음마를 하고, 처음 이유식을 먹고, 처음 어린이집을 가고, 처음 학교에 가고, 처음 여자친구를 만나고, 처음 헤어지고.. 이런 모든 경험을 하나의 점으로 나타낼 수 있어. 그리고 우리의 삶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이 무수히 많은 점들을 연결해서 하나의 직선으로 나타낼 수 있지.


여기에 큰 그림이 하나 있다고 치자. 그리고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다양한 색을 배웠고, 같은 색이라도 그 미세한 차이까지 구분할 수 있는 반면, 다른 사람은 빨강, 초록, 파랑, 검정 등 그냥 단순히 색만 아는 사람이야. 이 둘이 같은 그림을 볼 때 어떨까? 아무리 같은 그림이어도 서로 보는 느낌이랑 깊이가 다르겠지? 이게 바로 경험이야.


그렇다면 '불성(Buddha's nature)'이라고 하는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이란 무엇일까?


예를 들면, 네가 너무나 사랑하는 여자친구랑 헤어졌다고 생각해 봐. 슬프고 괴롭지. 그래서 술도 마시고, 울고, 그러면서 인생이 망가지겠지. 그런데 우리는 Buddha's nature, 즉 경험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그렇기 때문에 그냥 경험한 거야. 다시 말하면 여자친구랑 헤어진 것도 일종의 경험인 거지. It is just part of the experience to separate from her.


이 상황을 경험이 아닌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그 감정에 매몰되어 괴로워져. 그래서 그 상태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거고. 그건 불성이 아니야. 다시 말해서 불성은 모든 것이 나의 삶을 이루는 하나의 경험(점)이라고 생각하면서 나아가다는 것. 그러다가 또 다른 경험을 맞이하는 거고. 가족이 죽었어. 슬프지. 그런데 그것도 우리의 삶을 이루는 무수히 많은 점 중의 하나인 '경험'이라는 거지.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면서, 같은 그림이라도 다른 이들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이게 바로 Ability to experience이고, 또 Buddha's nature인 거야.


...


우리의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그저 담대하게 뚜벅뚜벅 나아갈 수 있기를. 그 어떤 시궁창 속일지라도, 그 안에 매몰되지 않고, 지나칠 수 있기를. 그래서 조금은 더 쉽게 행복해질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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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